타히티의 여인들
탈인상주의의 선구자
폴 고갱(Paul Gauguin).
그는 35살에 화가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너무 늦은 나이와 그의
독특한 화풍 때문인지
고갱의 작품은 파리 미술계에서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파리에 크게 한탄하며
남미의 파나마, 마르티니크 섬에
정착하며 자신의 예술성을 찾고자 하였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결국 돈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막혀
고갱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개척하기에는
차라리 파리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결국 마르티니크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그곳에서 운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였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느꼈던 탓인지
고갱은 9주 동안 고흐의 노란 집에 머물며
작품 활동에 충실히 몰입하였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고갱과 고흐가 함께 하기에
고갱은 너무나 오만했고
고흐는 조울증, 강박증을 겪으면서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관은
점차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불화는 점점 깊어져만 갔다.
1888년 12월, 급기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렇게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나게 되었다.
고갱은 다시 파리를
탈출하고 싶어 하였다.
산업화의 밀림과 척박함만이
뻭뻭하게 들이찬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을뿐더러
어떤 영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갱은 머나먼 변방
타히티로 떠났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3가지 질문은 타히티로 이주한
고갱이 자신의 그림에 붙인 제목이다.
고갱은 이 3가지 질문에 각각을 상징하는
존재 3명을 그림에 심어놓았다.
그림의 맨 오른쪽의 아기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응하는 존재로
존재의 시작과 삶의 시작, 보살핌이
간절히 필요한 어린 탄생을 의미하고
사과를 따고 있는 청년은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응하는 존재로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세,
고찰적으로 성찰하는 우리를 담아냈다.
맨 왼쪽의 노파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응하는 존재로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삶의 끝에 이르러
생각에 잠긴 우리를 표현하였다.
파리에 염증을 느끼고 타히티로
이주한 고갱이었지만
고갱의 시선은 여전히
파리에 머물렀다.
그는 타히티를 그리면서도 그림을
끊임없이 파리 살롱에 출품하였고
친구들에게 그림을 파리에 팔아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얻어왔다.
1893년에는 아예 파리로 돌아와
고갱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나
여전히 파리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바뀌지 않는 파리 미술계에
고갱은 크게 실망하며 분노하였다.
그리고 3년 뒤 1896년, 다시
파리를 떠나 타히티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 고갱은 꽤나
결연하게 파리를 버리듯이 하였다.
파리를 버린 고갱은 타히티에서
마지막 삶과 이야기를 남기는데
그렇게 1897년에 이 그림을 남기면서
고갱 자신의 삶과 죽음,
그 끝을 고찰하는
마지막 대작을 남긴 것이다.
온갖 미화와 이야기를 걷어낸
고갱의 삶은 마치 족쇄 같았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를 버리고
머나먼 타히티로 이주를 반복하였지만
고갱의 시선은 언제나
파리에 있었고
타히티는 고갱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인 동시에
그 끝은 파리가 감탄할 만한
작품을 그리기 위한
지극히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파리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난
고갱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 파리의 족쇄에
메여있던 것이다.
과거의 기억.
그리고 기억.
기억에 관하여
이전의 인상 또는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그러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기억을 떠올린다는
행위는 시각 피질에서 대상의 모습을,
청각 피질에서 대상의 소리를,
후각 피질에서 대상의 냄새를 활성화하여
각각의 조건을 조합하여 대상을
기억으로 떠올린다.
즉, 기억은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기억이란 우리의 뇌 속
어딘가 숨겨져 있는 한 덩어리를
마치 선물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듯 짠하고 꺼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피질에 활성화된 조각들을
맞추어 조립하는 형태이다.
때문에 우리는 같은 기억을 떠올리더라도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기억의 조각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조금씩 기억이 달라지기도 한다.
기억 조각을 자주, 열심히
조립하지 않으면
기억 자체를 생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오랜된 일은 기억나지 않아요"
(영화 카사블랑카 中)
우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상당히 의심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로
인정하는 이유도
인간의 기억이 결코
그렇게 완벽하지 않음을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간은 기억의 불량을 조각하는
훌륭한 조각가이다.
우리는 당장 어제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금방 기억해 내지만
10년 전 오늘의 기억이나
20대에 갔던 병원의 이름,
30대에 산책을 하다 일어난 일상적인
사건들은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현재의 시간과 가까울수록
기억을 잘 떠올리지만
과거의 시간과 가까워질수록
기억은 점점 더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먼 과거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강렬한 기억이다.
누군가와 싸웠거나, 사고가 날 뻔했거나
트라우마로 남는 사건을 겪게 되는 등
우리의 뇌는 감정적 자극이
동반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대뇌의 변역계가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고 간뇌의 시상하부를 통해
신장의 부신에서 아드레날린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작동한다.
이때 아드레날린은
피부나 소화기관처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부위에
혈액 공급을 줄이고
뇌와 심장과 같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위에 혈액 공급을 증가시켜
판단력과 운동 능력을 극대화해
위기에 대처하고자 한다.
우리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들면서
그 순간의 기억이 오래 남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긍정적인 기억도
오래 남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순간과 위기 상황에 처한
기억이 더 많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이 기억의 목적,
바로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로라 카르스텐슨(심리학자)
"우리는 긍정적인 경험보다 부정적인
경험을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로라 카르스텐슨(심리학자)
"위험했던 경험에서 배워야 할
정보가 더 많으며"
로라 카르스텐슨(심리학자)
"미래에 비슷한 상황에서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계 어느 곳이나 어느 인종이든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곧 그 사회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얼마나 잘 생존하느냐에
척도로 여기 왔기 때문에
기억력 발달을 큰 장점이자 하나의
능력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억을 보존하고자 원시의 손짓은
곧 혀를 튕기는 말과 소리가 되었고
말과 소리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문자와 문서를 남겼다.
그러한 문자와 문서로 우리는
지식의 계승을 이루었고
지식의 계승은 새로운 지식을 낳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을 어떻게든
살아 남기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사실 우리는 기억에
매우 취약하고
무언가를 잊는 것에 더 최적화되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바로 기억의 안티테제(antithesis),
망각의 존재이다.
망각에 관하여
망각이란 잊는 것이다.
망각은 기억을 암호화하는
뇌의 뉴런 간 연결이 끊어지거나
뉴런들의 수명이 다하는 이유로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즉, 우리는 망각을 겪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나 힘을 쏟지 않아도 되며
망각의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아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기억을 하고자 뇌의 시각,
후감, 청각 피질을 동원하여
흩어진 기억 조각을 모아 다시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면서
인위적으로 뇌의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약해지며 소멸을 앞두지만
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해지며
기억의 모든 것을 삼키고자 기회를 노린다.
시간은 망각의 편이다.
망각은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기억조차
망각시키기 때문에
기억과 달리 많은 문화권에서
망각을 나쁜 것으로 여겼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각은
무의식 속에 언제나 일어나고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에 걸쳐 기억하는
장면은 몇몇에 불과한다.
그리고 이렇게 망각을 뚫고
긴 시간을 거슬러 기억된 장면이 모여
곧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모습을 완성한다.
바로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그대로의 나 자신에 대한
존재의 본질을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존재에 대한 의의,
나 자신에 대한 해석을 의미한다.
즉 나 자신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나 자신의 해석의 근거가 되는
기억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은 달라질 수 있으며
정체성의 재조합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체성을 이루는 기억은 결국
과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정체성은 과거에 옭아메어져
과거의 사슬을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정의를 다르게 생각하려 할 때쯤
정체성은 우리의 기억을 쥐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내가 기억하는 내가 아니야'
기억의 이면
시간의 힘을 이겨낼 만큼
강렬한 기억들은 끝내 살아남고
살아남은 기억이 모여 나 자신을
완성하게 될 때쯤이면 기억은 고착화된다.
고착화된 기억은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며 도무지 바뀌려 하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일이 계속해서 기억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나 자신의 정체성 역시 과거의 기억에
옭아메어져 고착화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과거의 일이 사라져 버린다면
기억의 고착화를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이는 어떤 경우가 따라오더라도
불가능하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시간과
이어지며 나의 현재를 지배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문제에
직면하게되면 마치 조언을 구하듯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쉽게 좌절에 빠진다.
과거의 기억은 도무지 좋은 이야기보다
나빴던 경험을 더욱 속삭이기 때문이다.
"해도 안될거야"
"내가 그렇지 뭐"
그러나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서
앞으로를 살아갈 시간의
선택권을 쥔 우리에게는
과거를 벗어난 변화와 탈피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며,
이는 불가항력적이며 필수불가결하고
운명적이며 비타협적 절실함이면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와 탈피를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변화와 탈피의 시점이 찾아올 때
과연 기억은 나의 변화를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수 있을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 미술계에
분노한 고갱은 자신의 변화를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나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고갱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파리가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그쳤고
타히티에서의 삶은 결국 파리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파리를 향해있었고
파리의 기억은 그의 족쇄가 되었다.
변화와 탈피가 절실한 순간
생존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기억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고착시키는
수단이 되고 만다.
기억의 이면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행위는 망각이 내재한다...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과 비슷할 것이다...
불면과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반시대적 고찰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
즉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마치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것과 같아서
어떤 한도에 다다르면 결국
파멸하고 만다고 말이다.
기억과 기억과 기억의 연속적 중첩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아서
특정 시기, 변화가 필요한 그러한
시점이 오면 우리는 파멸을 앞에 두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망각은 비로소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
기억 경쟁
망각은 시간과 너무나 친숙하여
시간이 흐르면 망각도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망각에 대한
흔한 편견은
망각이 시간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 망각의
영역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시간에 따라
망각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기억이 잊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억이 잊혀짐과 망각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기억이 잊혀짐은 시간의 흐름을
기다리며 타성에 젖은 수동적 행동이라면
망각은 나의 의지로 반영된 자성에 의한
적극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다...
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량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니체는 기억이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결과로써의 망각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잊는다'라는 말보다
'기억을 지운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우리가 갖춘 능력으로서의
망각을 말하였다.
여기서 능력으로서의 망각을
실행시킬 키워드가 등장한다.
바로 경쟁 기억(Competing memory)이다.
경쟁 기억이란 A기억을 B기억과
경쟁시켜 B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A기억과 B기억은 서로 대체가능한
수준의 제로섬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할 때
덮밥을 먹은 기억과 김밥을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면
덮밥과 김밥은 서로
경쟁 기억이 된다.
이때 점심으로 덮밥을 먹은 기억을 계속
떠올리는 우리의 뇌를 MRI로 찍어보면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점심으로 먹은 덮밥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그와 경쟁 기억 상태인 김밥의 기억
패턴을 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 덮밥에 대한 기억을 많이 떠올릴수록
김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진다.
즉,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려는 행위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신경과학이 밝혀낸
성과이다.
마리아 윔버(신경과학자)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를 망각하는 원인이 된다"
그렇게 니체가 말하는
능력으로서의 망각은
경쟁 기억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기억으로 만들어낸
정체성이 현재 우리의 족쇄가 된다면
우리는 기억으로부터의 족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부터의
관점으로 기억을 재조립해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족쇄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재해석한 정체성은 기존의 정체성과
경쟁 기억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재해석한 정체성을 더 많이
더 세밀하게 기억을 반복해
기존 정체성의 기억 패턴을
억제하여
경쟁 기억에서 재해석한 정체성이
승리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 끝에 우리는 우리의 족쇄였던
과거의 기억과 기존의 정체성을 벗어나
현재의 기억과 재해석한 정체성을
가지고 변화의 전기를 이룰수 있게 된다.
그렇기때문에 능력으로서의 망각은
과거의 기억 속 나를 잊고
현재의 기억을 쥔 나로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기에
현재와 지금의 가치가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것.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존재의 바퀴가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매 순간마다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매 순간마다 존재는
시작된다고 각인하며
존재의 바퀴가 굴러가듯 순간의
자신에게 충실할 것을 촉구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 과거의 기억에
끝없이 밀려나는 현재에 집중하며
지금의 나와 지금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구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과거로부터의
기억 탈피로 이어지며
구시대 유물을 깨뜨리는 것이며
역사를 몰락시키는 것이며
현재를 부흥시키는 것이며 현 시대적
가치를 이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변화의 순간을 깨닫고 기억으로부터
고통받는 고갱의 모습은
변화의 필요성을 이미 알고 있지만
주저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순간을 깨닫고, 필요성을 느끼지만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나의 중심을 가까운 지금이 아닌
머나먼 과거에 두는 것과 같아서
망각의 순간을 거치지 못한채
기억의 족쇄에 메여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망각할 것을
망각해야할 선택지가 있으며
망각을 실현할 때 비로소 매 순간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동안 매 순간 묻는다.
우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우리는 쉽게 흔들리며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해석을 반복한다.
과거의 해석을 반복한 끝에 지금의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받는다.
고통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지금을 살아감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을 살아가며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것,
아모르 파티(Amor Fati).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나의 세계와 나의 운명과
나의 지금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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