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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냉소의 단계 (나는 냉소적인 사람인가+시니컬과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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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   


냉소 冷笑.

가장 차가운 단어를 꼽자면 인간 심리속
가장 차가운 곳에 자리한 단어.

냉소라하면 차가울 냉(冷)
웃음 소(笑)를 붙인 단어로

직역하자면 차가운 웃음, 깊게 들어가면
차갑게 느껴질만큼 쓴웃음,



그러하게 여길 정도의 비웃음 정도로
해석할 수있다.

학문적으로 냉소적이라함은 쌀쌀한 태도로
남들을 비웃음또는 업신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의미나 일반적인 인식속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달라지는데

사회적으로 냉소적이라 함은 쌀쌀한 태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인식,

 

비관적인 의식이 포함되어 냉소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고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다는

의미는 흐려진다.

 

여기서 냉소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은 왜 타인을

업신여기는 태도와는 선을 그을까?

 

사회적 관념이란 인간의 집합체인

사회라는 구조에서

 

인간이 인간과 통하기 위해 만든

공통된 생각을 말한다.

 

가장 큰 예를 들면 도덕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 날 수 없으며

 

관념에서 벗어나는 즉시 각종 비판과 함께

사회적 사형대에 서게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회적인 관념 속 냉소가

학문적 관념 속 냉소와 달라진 이유이다.

 

사회 속에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가 계속되면 그 사람은

 

냉소적이라는 판단을 받기 전에

'예의가 없다' 또는 소위 말하는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을 먼저

듣게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냉소적인 사람이라도 적어도

사회에서 버림 받지 않을 정도의 선이있고

 

그 선을 지키면서 사회와 공생하며

자신의 비관을 어느정도 숨기려하지만

 

냉소적이라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껏

무시하고 다니던 냉소적인 인간은

 

이미 오래 전 사회속에서

사형당했다.

 

때문에 냉소적인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사회 속에서 비관적이지만 속을 삭히며

'일반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군상과

 

사회 속에서 비관적이면서 소신껏

행동하며 '비주류'로 살아가는 군상이다.

 

전자는 자신의 비관을 내비칠때 일반적이지 않은

반전 행동에 사람들이 놀라고

 

후자는 늘 자신의 비관을 드러내며

사회 속에서 팽(烹) 당하기 십상이다.

 

일반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주류로 살아가는 것.

 

냉소는 과연 어떤 자리에 서야할까.

 

 

   마이너하게   

 

마이너(minor)한 것은 비주류한 것,

대중적이지 않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메이저 리그에서 수십 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홈런을 치는 선수가 있다면

 

그 뒤에는 경기장 어두운 구석에서

묵묵히 스윙을 연습하는

 

마이너 리그 선수가

있기 마련이다.

 

시대에 유행하는 팝과 음악이

거리 곳곳에서 재생될 동안

 

길거리에서 자기 음악을 노래하지 않으면

누구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인디밴드의 작은 외침이

들리기도 한다.

 

마이너한 것은 대중이 선택한 주된 답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때문에 마이너한 것은 수가 적고 소수이며

마이너함을 추구하는 것은

 

괴짜나 하는 아주 특이한 행동으로

포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중의 의견과 반대되는

소신을 가진 어떤 이,

 

사회의 주류 인식을 비판할 수 있는

어떤 이는 마이너할까?

 

답은 마이너하다.

 

사회의 사상은, 특히 시민 사회가

출범한 후로는

 

시민들의 지지가 곧 사회의 사상이자

사회의 얼굴이었다.

 

즉, 다수의 지지를 얻은 사상이 이를

정치하는 정당을 통해 대표되었으며

 

이것에 비관하고 반기를 든다는 것은 다수의

지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로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소수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사회가 정말로 잘못되었고

 

그들이 추구하던 생각이

정말로 잘 맞았다면

 

마이너한 그들은 냉소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회 비관적인 괴짜일까.

 

나치의 광기에 모두가 열광하고 충성을

맹세할 때 한 남자는 소신을 보여주었다.

나치 경례를 거부한 란트멘서, 몇년 후 군대로 끌려가 실종되었다

 

여성이 참정권을 꿈도 못꾸던 시대에

한 여자는 몸을 던졌다.

"여성에게 투표권을!"라고 외치며 말에 뛰어들어 사망한 에밀리

 

군인의 총칼로 시민들을 억압할때

한 사람은 차라리 붓을 놓았다.

광주 민주화 운동 보도 검열에 집단 사직한 기자 일동

 

이들은 사회 모두가 옳다고 말해도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있는

 

냉소적인, 그것도 적극적인

'비주류'들이었다.

 

그렇기에 마이너를 선택하는 것은

불안하다.

 

자신이 다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인간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다수의 힘에 붙어 자신이 하는 행동 전부가

틀리지 않았기를 증명하려 애쓰고

 

소수로 내몰리는 순간 다수로부터의

시선을 따가워하며 스스로를 불안해한다.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비주류의 역할을,

마이너를 포기한 채 자신을 속이기도하지만

 

이미 마이너했던 그들은 불안에 떨며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망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선택을 하기로했다.

 

사회가, 타인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고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더라도

 

비주류인 그들은 그저 울지 못해

웃어버리는 냉소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극히 소시민적이지만 마치 다수인척,

티내지 않고 속으로만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마이너한 그들은 이타적일래야

이타적일수 없는,

 

이기적인 생각과 개인주의로

자신을 방어한 채

 

더욱 냉소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시니컬하게   

 

시니컬(cynical)은 단어자체가 주는

느낌이나 어감이

 

시크(chic)와 비슷하여 두 단어가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두 단어의 차이를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시니컬은 쌀쌀한 태도로 비웃음,

냉소와 뜻이 유사하고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도 시니컬로 통한다.

 

시크는 세련된, 깔끔한 차림새를

뜻하는 단어로

 

흔히 알고 있는 시크한 캐릭터는 사실

시니컬한 캐릭터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시니컬을 이런 의미 하나로

정의하기엔 모자람이 많다.

 

시니컬은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러하다 라는 추측이나 태도

 

그런 모양새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이기에

 

당장 시니컬을 떠올려보면 특정 현상이 아닌

시니컬한 분위기나 상황이 떠오른다.

 

냉소적이라는 말과 뜻이 비슷해도

냉소적이라는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니컬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벽이 있기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회 통념은 타인에게 친절하고

늘 이타적이며 봉사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이것은 분명 자신이 먼저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이 뒤따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시니컬은 완전히 타인에게 친절하지도,

완전히 이타적이지도 않으며

 

완전히 봉사하지도 않는, 약간은

이단아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반항하는 어린아이의

심리와는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의자에 앉아 깊게 생각하는

노인의 심리와 비슷하다.

 

시니컬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쏟아내기 전에 먼저 생각하고

이미 정의가 내려진 관계에도

 

자기 스스로 다시 정의해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자신이

충족할만한 이유나 사유가 된다면

 

그때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적극적으로 관계에 개입하지만

 

충족할 이유가 빈약한, 그저 그렇거나

또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면

 

뒤도 안돌아보고 딱 그 정도만

자신을 조금 쏟아내고 말 것이다.

 

이런 태도는 반항으로 보여지지만

그저 그냥 싫어서 반항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이미 생각된

행동의 결과물일 뿐인지라

 

오히려 깊게 고민하는 노인의 심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것이다.

 

때문에 일반적인 타인은 이것을 보고

차가운, 냉혈한이라 여기는 것이고

 

그것이 시니컬이 가지고 있는

벽인 것이다.

 

벽의 이름은 냉정.

 

벽으로 인해 시니컬함은 더욱 도도해지고

감정이 차분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은 시니컬한 어떤 이가 의도해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시니컬하기 때문에 파생된 이차적인

심리 양식인 동시에

 

이를 본 타자가 느끼는 공통된 결과론적

프레임의 공존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니컬함도, 이를 지켜보는 타자도

차가운 심리적 벽에 관해서는 무죄이다.

 

하지만 차가운 심리적 벽에

가로막히는 이를 고르라면

 

그것은 타인이 아닌 시니컬한

본인이 골라진다.

 

시니컬함은 냉소와 닮았지만

냉정과 더 친하다.

 

냉정함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칼잡이를 나에게 주는 방어 도구이다.

(냉정함은 공격적이지 않다)

 

관계를 시작하는 것, 맺고 끊는 것,

결론 지어버리는 것을 승리라 한다면

 

더 냉정할수록 늘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불공평한 게임이 치뤄지는데

 

칼잡이를 쥔 냉정한 이는 언제나

게임에서 승리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언제든 냉정해질 준비가 익숙해

관계에 있어 적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를 마주한

타인의 운명이 더 궁금해진다.

 

타인은 냉정한 이의 칼끝을 마주하고

서 있는 불쌍한 운명에 처해진다.

 

당연히 언제나 냉정함은 이기고

덜 냉정한 죄로 타인은 패배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관계의 게임이 끝나자

오히려 냉정함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왜냐하면 관계의 게임은 나 그리고 타인이

전부가 아니라

 

타인으로 가득한 사회와 공동체에서

계속해서 게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정함이 계속 될수록 타인과의

게임에서는 늘 승리하지만

 

타인으로 가득한 사회와의 게임에서는

철저하게 패배하게 된다.

 

그 누구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니컬은 스스로 낳은 냉정의 벽에

가로막혀 고뇌에 빠지게된다.

 

그래서 시니컬은 차라리

가면을 쓰기로했다.

 

자신이 시니컬함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냉정이란 본래 없는 척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냉정이 튀어나오며

 

작은 일에도 더 생각하게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관계의 의미를 계산하게된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척한다.

 

이것을 밖으로 드러냈다가는 또다시 냉정한

인간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타인과의 관계를 즐기며 냉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수한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늘 고민하며 언제든

냉정해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은 시니컬한 본래 모습을

숨겨놓고 마치 연기를 하는 것이라

 

이런 일이 거듭될수록 시니컬함은

아주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시니컬은 이익도 손해도

보지 않는 제로 게임을 시작했다.

 

절대로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쏜아 붓지 않으며

 

자신이 생각한 만큼만, 자신이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정도만 움직이기로 하였다.

 

딱 0이 되는 만큼만 말이다.

 

시니컬이 자신을 숨긴 덕분에 타인과 냉정한

관계보다 훨씬 더 원만한 관계가 이어졌으며

 

자신을 숨긴 댓가로 치루는 피곤을

제로 게임으로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시니컬함은 점차 냉정을

누르는데 익숙해지고 냉정에 무뎌지면서

 

냉정으로 관계를 망치느니 차라리 한번 웃고

넘어가는 냉소로 변하게 되었다.

 

시니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래의 냉정한 모습을 숨기고

냉소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는 이타적이라는 말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전략으로

 

그래서 시니컬은 비로소 냉소가 된다.

 

 

   나는 냉소적인 사람인가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로

 

한 사람이 한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루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이를 만나며

 

관계의 경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현대 사회에 들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기술의 발달로 교통과 통신이

범 지구적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한 사람에게 주어진 관계의 수 그리고

미래의 경우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관계의 증폭으로

그에 따른 피로도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SNS나 인터넷상 글을 보면 유독 인간 관계가

힘들다거나 이제 관계를 정리한다거나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이 사회 규칙이

되었지만 오히려 더 좋다는 유머있는 글,

 

집돌이, 집순이 키워드가 상위를

차지하는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관계가 좋고 싫고를 떠나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는 지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부딪혀 발생하는

피로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두개의 자아가 부딪혀

피로를 만들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사회가 원하는

나라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중

가장 대표적이며 기본이되는 것은

 

사회는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이 완전하게

이타적이지도 헌신적이지도 않다면

 

나는 나와 사회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이타적일 수 있는, 헌신적인 척을 해야한다.

 

이것은 나의 원래 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쓴 것이라

 

가면 뒤에서는 자아 혼란으로 차가운

쓴웃음이 나오는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또한 타인과 사회가 주장하는

대세인 의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다시 정의해보며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자신은 타인과 사회의 의견과 

완전히 같지 않으며

 

오히려 '왜 희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타인을 보며

 

약간은 타인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타인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잔인하게도 타인에게 친절할 이유가

전혀 없어진다.

 

그렇다고 우월함을 느끼진 않지만

가치없는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일은 절대 없으며

계산적이고 신중해진다.

 

그리고 시니컬해진다.

 

이런 생각의 프로세스는 이성적으로

냉정하다는 말에 걸리기 쉬우며

사회와 타인이 지극히 헌신적이라고

생각하는 이타론자들에 의해

 

이기주의라는 프레임에 찍혀

몰리게 된다.

 

이기주의는 사회가 원치 않는

철저한 비주류이며

 

사회와 타인은 이기주의가 사회와 타인을

무너지게하리라고 두려워한다.

 

그렇게 비주류의 길로 접어든 이기주의와

시니컬한 냉소는 동시에 마이너해진다.

 

그런데 이기주의, 이기적이라는 말은

모두가 죄를 지은 것처럼

 

단어 자체를 피하려하고

금기시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그렇게 순수하게

이타적이지 않음을,

 

타인이 보는 내가 전부가 아님을, 이기적임을

알고있으면서 죄인이 되기 싫어 부인한다.

 

냉소한 이들은 이 웃긴 상황을 알고있으면서

인정하기에 더욱 냉소해지고

 

일반적인 타인은 자신이 부인할 뿐

사실은 이기적이라

 

언제든 냉소하게 변할 수 있으며 다만 그것을

얼마나 일찍 인정하느냐의 차이이다.

 

고로 냉소한 이들 뿐아니라 일반적인

타인도 언제든 냉소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스스로 냉소적이라 생각해 본적이 없어도

이기적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냉소하다는 것은 냉정하게 생각한 끝에

차라리 웃는 것이 나음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타인과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스스로를 사회의 주류에 대해 의심하는

시니컬한 마이너가 되어간다.

 

나는 타인이 보는 모습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자.

 

나는 냉정이 필요할 만큼

자아가 혼란스럽고

 

더이상 물러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임을 인정하자.

 

냉소적인게 싫다고 몸부림쳐도

어쩌면 이미 약간은

 

냉소함이 존재하는 것에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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