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부르는 사람
김대중&하시모토 류타로
"결승전에서 만납시다"
1996년, 2002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가 확정되자
한국 대통령 김대중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가
한일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서로 덕담하며 건넨 말이다.
그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한국 대표팀은 네덜란드에게
5:0으로 대패하였다.
5:0 대패의 충격은 2002 월드컵을
앞둔 시점이라 더 충격적이었는데
이용수(당시 기술위원장)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신문선(당시 해설위원)
"속수무책이네요"
월드컵 개최국인 한국이 월드컵 16강에도
못오를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2000년에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
U-16/U-19를 4강에서 탈락하면서
이대로라면 한국 축구가 정말
희망이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고전하고 있는 한국의 K리그와
다르게 일본의 J리그는 흥행이었다.
프랑스의 명장 필립 트루시에 영입을
성공하는데 이어
1999년 U-20 월드컵 준우승,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 진출,
2000년 AFC 아시안컵 레바논 우승을
따내며 승승장구하였다.
만약 2002 한일 월드컵을 개최해놓고
한국은 16강 진출 실패,
일본만 16강에 진출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을 것이었다.
이에 한국은 큰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용수(당시 기술위원장)
"아침에 일어나 시작했던 하루일과는"
이용수(당시 기술위원장)
"대국민 사과문을 쓰고
다시 수정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정몽준 회장은 이용수 위원장과
이야기를 할때
농담으로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정몽준
"대표팀이 16강에 못 든다면 우리 둘 중하나는
한강에 뛰어내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국은 이 위기를
반드시 돌파해야만했고
그렇게 나온 돌파구가 바로 외국인
감독 영입이었다.
한국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개최한만큼"
한국
"이상태라면 죽도 밥도 안되는
개망신만 당하겠다"
한국
"그러니 우리를 냉철하게 꼬집어줄
새로운 얼굴, 새로운 감독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왕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기로 결정한만큼
돈을 얼마를 쓰더라도 좋으니
초일류급 감독 영입 계획을 세워나갔다.
한국
"돈이 문제가 아님"
영입 타겟 1순위는
프랑스의 에메 자케.
가장 최근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에게 트로피를 안긴 스타 감독.
당시 프랑스 축구 협회에서
기술 고문으로 재직 중이었으므로
연봉 협상만 잘되면 다른 문제없이
영입에 성공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2순위는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
에인트호번 감독 대행을 맡은
다음 해인 1988년,
네덜란드 프로 축구 1부 리그
에레디비시 우승,
네덜란드 국가 축구 대회 KNVB 우승,
유럽 축구 대회 유러피안컵 우승을 이루며
유러피안 트레블을 달성한 명장이자
공인된 감독인 동시에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를
4위로 올려놓은 감독,
그리고 그때 한국에게 5:0
패배를 안긴 악몽의 감독이었다.
3순위는 네덜란드의 조 본프레레.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나이지리아에
금메달을 선사한 쟁쟁한 감독.
4순위는 크로아티아의
미로슬라프 블라제비치.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를
3위에 올려놓은 혜성같은 감독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감독 영입을 진행할
인물은 현대 중공업에서 재직하다가
정몽준 회장을 따라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발탁된
가삼현 이사였다.
가삼현 이사는 영입 1순위 에메 자케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에메 자케는 이미 월드컵
우승 커리어를 따낸 동시에
더 이상 감독직을 맡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고
에메 자케
"한국과 프랑스 대표팀은 물론이고"
에메 자케
"어느 나라의 대표팀이나 클럽 팀도
맡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프랑스 유소년 축구를 위해
남은 일생을 보내겠다며 선을 긋자
가삼현 이사는 아쉽지만 다른
인물을 모색해야만 했다.
가삼현
"새로운 감독 임명을 두고
후보 명단을 추리던 중에
가삼현
"불현듯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다음 영입 후보는
네덜란드의 히딩크였다.
가삼현 이사는 곧장 네덜란드로
날아가 히딩크 대리인과 접촉하였다.
히딩크
"한국 축구를 잘 몰라 당장
결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히딩크는 한국 축구를 잘
모른다며 직답을 피했다.
가삼현 이사는 히딩크를 1순위로 두고
나머지 후보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히딩크의 애매한 답변에 가삼현 이사는
히딩크와 직접 대면하길 원하였고
그렇게 각자의 이해를 위한
움직임이 분주해져만 갔다.
히딩크와의 만남
2000년 가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집에 있던 히딩크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인물은 가삼현 이사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자는
요청이었다.
히딩크
"좋습니다 한번 만납시다"
히딩크
"지금 어디십니까?"
가삼현
"우린 이미 암스테르담입니다"
히딩크
"...!"
암스텔 호텔 로비에서 만난 둘은 곧
감독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가삼현
"(히딩크가)전보다 더 뚱뚱해져서
무척 놀랐다"
가삼현
"살도 더 찌고 콧수염은 없어졌다"
가삼현
"그는 동의도 거절도 하지않았다"
하지만 히딩크가 이렇다 할 대답은
피하고 여전히 고민하는 듯 하자
가삼현 이사는 히딩크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가삼현
"이미 알려진 강팀을 이끌고
성적을 내는 것도 좋지만"
가삼현
"아직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한국이라는 팀을 이끌고"
가삼현
"성적을 내는 것도 감독으로서는
매력적인 일 아닙니까"
히딩크
"음...!"
그러자 히딩크는 잠깐 침묵하더니
잠시 후, 대답을 이어나갔다.
히딩크
"좋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히딩크
"첫 번째는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을
무제한으로 보장하는 것이고"
히딩크
"두 번째는 전 세계 필요한 곳을 모두
돌아다니며 전지 훈련을 하고"
히딩크
"강팀과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가삼현
"...!"
이 말은 축구 협회는 오직
지원만 충실하게 하고
감독의 권한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협회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강력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가삼현
"..."
가삼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가삼현 이사는
생각해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가삼현
"원하는 대로 해드겠습니다"
히딩크
"!!"
히딩크는 깜짝 놀랐다.
히딩크 본인도 자신이 말한 조건이
절대 성사될 수 없는
아주 무리한 조건임을 알고
들이민 것인데
그 조건마저 한국 축구 협회가
승낙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히딩크
"나는 그 두가지 조건이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삼현 이사도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고
심지어 본인도 이 조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가삼현
"그가 거절하려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
가삼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히딩크는 쉽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정도로 한국은 절박하였다.
지푸라기라도 있다면 붙잡겠다는
심정으로 히딩크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가삼현 이사의 한마디에 히딩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스위스에서 히딩크와
두번째 만남이 성사되었다.
히딩크
"내가 선수들에게 아무 이유없이
나무에 오르라고해도"
히딩크
"그걸 받아들일수 있겠습니까?"
가삼현
"감독님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히딩크
"...!"
히딩크
"그런 지원이라면 한국 대표팀을
맡을 용의가 있습니다"
히딩크는 다음날에 구두 계약으로
한국 감독을 수락한다고 전했고
계약금 100만 달러, 연봉 100만 달러,
성과급도 이에 못지않는 금액으로
(100만 달러=한화 약 12억원)
협의를 마치면서 기타 구체적인
사안도 계약을 마쳤다.
히딩크는 98년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를
4위로 올려놓고 이후 레알 마드리드 CF와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감독으로
부임하였지만 연이어 경질당하였다.
히딩크는 감독으로서 인생에
기로에 선 상황이었고
유럽 빅리그에서 좁아진
자신의 입지를 타계하기위해서는
새로운 무대에서 반드시 성과를
보여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히딩크의 입장과 한국의
절박함이 잘 맞아떨어져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 히딩크는
성공적으로 한국으로 부임한 것이다.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 영입 성공을
바로 공식 발표하였다.
히딩크 감독도 1999년 1월 이후의
매치 자료를 협회에 요청하면서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서 부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축구협회는 2000년 12월 10일까지
히딩크와 감독 계약을 마치고
12월 20일에는 한일전 첫 경기에
히딩크를 벤치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런데 2000년 12월 6일이
지나도록
히딩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것은 3년전 이야기일 뿐
히딩크의 무소식에 협회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아직 계약 시작도 안했는데
너무 일찍 발표한거 아니야?"
"히딩크 마음이 바뀐거면?"
그렇게 12월 7일,
애만 태우던 협회로 히딩크의
연락이 왔다.
히딩크
"감독을 최종적으로 수락하겠다"
히딩크
"대신 20일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 친선전은
벤치가 아닌 관중석에서 지켜보겠다"
그리고 2000년 12월 16일,
히딩크는 한국으로 몸을 실었다.
히딩크는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당시 한국의 인식은 중국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 또는
일본 옆나라 정도로만
인식되어왔고
히딩크 본인도 크게
잘 알지 못했을 뿐더러
히딩크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웃집에 사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가
들려준 이야기와
비행기에서 본 한국 안내 책자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2000년 12월 17일
오전 10시 55분,
히딩크가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히딩크는 협회의 요구에 따라
선수들과 상견례를 진행하려했으나
행사 직전에 돌연 상견례를
취소하였다.
히딩크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
히딩크
"나는 내년 1월 1일부터
정식 감독이며"
히딩크
"아직 한국 대표팀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입장이 아니다"
히딩크
"한일전을 앞두고 긴장한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다"
그러곤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멀찌감치 지켜보다 호텔로 돌아갔다.
언론에서는 한국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올리지 못하는 팀이라하며
과연 히딩크가 한국 축구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의문을 품었지만
히딩크의 답변으로 모든
의문을 일축시켰다.
히딩크
"그것은 3년전 이야기일 뿐이다"
히딩크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밝힐수는 없지만"
히딩크
"한국 축구의 경기력을
향상시킬 자신이 있다"
그리고 2000년 12월 20일,
히딩크는 관중석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 친선전을
직접 관람하였고
2001년 1월 1일, 한국 감독으로
공식 부임하였다.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가장 먼저 바꾼 것은
다름아닌 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히딩크는 12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친선경기를 보고
히딩크
"유니폼 색상이 너무 어둡다"
히딩크
"붉은색 기조를 유지하되,
조금 밝게 해달라"
하고 요청하며 실제로 유니폼 색상을
전부 바꾸게하였다.
"실제로 붉은색 유니폼은 근육 긴장도를
높여 칼로리 소모를 높이고"
"상대에게 적개심과 긴장감을
심어줄수 있는 심리적 효과도 있어"
또한 히딩크는 한국이 유럽이나 남미
축구 강팀을 상대로 선전하려면
선수 개인의 피지컬 플레이보다 팀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력을 이루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식 예절과 선후배간
엄격한 예의 문화였다.
사실 한국식 선후배 문화는 윗사람을
공경하는 동양적 미덕으로 여겨
이를 당연히 여기고
별 문제삼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몇몇 문제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가령 슛 찬스에 선배가 근처에 있다면
패스를 돌려 슛 찬스를 넘긴다던지
주전 편성시 실력이 비슷하거나
차이가 나도 고참 선배들은 늘 선발,
후배들은 예비로 편성되어
벤치에만 앉아있다가 끝난다던지
후배들이 눈치보느라 자유롭게
경기력을 평가하지 못하고
본인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 못한다던지.
선후배간 대화없이 군대식 분위기로
딱딱하게 식사한다던지.
가삼현
"한국에서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이 매우 중요하다"
가삼현
"팀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삼현
"때로는 선후배 관계때문에
경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히딩크는 이것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2001년, 유럽 원정을 떠나
호텔에서 밥을 먹기 전
히딩크 감독은 팀에서 막내인
이천수 선수를 불러들였다.
히딩크
"릴 리(이천수 선수 애칭),
여기 좀 와봐"
이천수
"네 감독님"
히딩크
"명보! 라고 해봐"
이천수
"네??"
이천수 선수는 크게
당황하였다.
명보는 당시 팀 주장이자 나이도 많고
카리스마있는 대선배인
홍명보 선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천수
"감독님 뭐라고요?
명보라고 하라고요?"
히딩크
"그래 해봐"
이천수
"...명보!"
그러자 호텔 식당은 금새
웃음바다가 되었다.
몇몇은 이 상황이 재밌는듯 웃었고
유쾌한 헤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으나
히딩크
"앞으로 그라운드에서
이렇게 해야한다"
히딩크
"긴박한 상황에서 형 호칭 붙이고
그럴 시간이 없다"
히딩크
"그라운드 안에선 누구나 동등하다"
히딩크
"대화는 모두 반말로 하고
서로 이름을 불러라"
히딩크는 팀 내 가장 막내에게
팀 최고참을 반말로 부르게 하며
한국 선수들이 예절 때문에 경기력을
놓치지 않게끔 훈련시키려하였다.
히딩크
"큰소리로 말하고 고함쳐라!"
히딩크
"왜 이렇게 훈련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물어봐라!"
전한진(당시 팀 매니저)
"한국 감독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전한진(당시 팀 매니저)
"한국 문화와 분리될 수 없었을 거고
방법조차 몰랐겠죠"
전한진(당시 팀 매니저)
"하지만 서양의 사고방식을 가진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전한진(당시 팀 매니저)
"그 외 많은 것들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호칭은 지위를 만들고 지위는
위계를 만들며
위계는 서열을 만들고
서열이 낀 집단은
자유로운 소통과 창조적인
발상이 존재하기 힘들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수직적인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꾸어
장차 한국 선수들이 선후배 문화나
예의 범절의 방해를 받지않고
본인의 역량 100%를
발휘하게끔 의도하였다.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던 히딩크 감독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갔고
히딩크라는 새로운 선장에 기댄
선수들도 의지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유대를 나누던 시기,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히딩크의 행보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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