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한 수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개최 전쟁으로
한창 시끄러울 시기
일본이 94년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면서
일본 개최가 확실해지던 상황이
한국 개최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일본
"..."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완전히
승기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
브라질을 비롯한 쟁쟁한 남미 국가들이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우리만 믿으라구"
아프리카 국가들은 딱히 표결하지 않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만하였다.
아프리카 축구 연맹
"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FIFA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가 여전히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주앙 아벨란제
"일본아니면 안된다니까"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1996년 3월, 말레이시아
아시아 축구 한일 결승전.
월드컵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두 국가가 한자리에 모였기에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결승을 넘어서
국가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모했다.
니시노 아키라(당시 일본 감독)
"한국은 종이 호랑이"
후반 36분, 수비수 이상헌의 기습
헤딩으로 일본의 골문이 뚫렸다.
0:0으로 이어지며 압박감 넘치던
경기가 한국의 선제골로 역전된 것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본의
조 쇼지가 한국의 수비를 넘어
오버헤드 킥으로 동점 골을 만들어 내며
승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시금 긴장이 이어지고
한국이 얻어낸 패널티 킥 기회.
한국의 최용수 선수가 침착하게
짧은 슛으로 골을 만들어내며
역대 최고로 치열했던 한일전은
2:1로 한국이 극적으로 승리하였다.
당시 한일 결승전 시청률이 무려 70.5%에
육박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으며
2002 월드컵 개최를 놓고 시작된
빅매치라 세계의 관심도 뜨거웠다.
김학범(당시 트레이너)
"일본은 앞으로 축구할 생각하지 말고
야구나 해라"
그렇지않아도 2002 월드컵때문에
특히나 민감했던 한일전은
한국과 일본을 한자리에서 극명하게
보여준 대항전을 치뤘는데
이 경기에서 한국은 일본을
끊임없이 압박하며
아시아 축구 종주국이라는 위상을
확실히 심어줬을 뿐아니라
그 끝에 일본을 결국 2:1로 이기며
극적인 승리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경기는 FIFA 고위 관계자들이
함께 직관한 경기였다.
FIFA
"Oh 한국 이정도였어??"
한일전 한방에 FIFA의 기류가
한국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FIFA 회원국들은 한일전에서
활약을 보여준 한국에 호감을 보여주었고
"한국 믿고있었다구"
특히 가장 큰 수확은 중립으로
일관했던 아프리카 집행위원들이
월드컵 개최 전쟁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프리카 축구 연맹
"그대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한국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지만
일본은 진퇴양난에 사면초가.
한일전에서 패배한 것도 서러운데
월드컵 지지기반도 잃어버린데다가
월드컵 진출 실패, 올림픽 축구 패배로
월드컵 개최 명분마저 없어져버렸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은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내려보던 한국에게
이러다 정말 월드컵을
빼앗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이몽
반전되는 분위기에 일본은
점점 초조해져갔다.
일본에게 2002 월드컵이란 80년대 후반
추락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침울해진 사회 분위기를 쇄신할
비장의 카드였으며
세계적 무대를 세워 국민들을
다시 통합하고
아직 일본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메세지를 줄 국가적 사업이었다.
게다가 대륙간 안배를 고려해봤을때
지금 이 시기를 놓친다면
2006년은 유럽에서, 2010년 쯤에는
경제 성장 규모를 봤을 때 아프리카,
그 이후에는 남미를 거쳐 그 후에야
아시아로 돌아올까 말까하지만
그마저도 중앙아시아나 중국이
치고 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을 놓친다면 약 20년을
마냥 앉아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일본
"아 이건 좀..."
그런데도 한국은 일본의 마음을
몰라주는건지
정몽준 회장이 아벨란제의
사무실까지 들어가서
월드컵 한국 개최를 위해 남북 단일팀도
구성할 의향이 있다고 어필하니
정몽준
"FIFA는 비영리 NGO단체 아닙니까"
정몽준
"분단된 한반도에 월드컵을 위한
세계 최초 단일팀이 등장하면"
정몽준
"평화와 인류애를 지향하는 FIFA의
위상이 더욱 올라가는겁니다"
일본으로서는 고민만 깊어지고
답이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일본
"안되겠다"
일본
"한국아 공동개최하자"
한국
"롸??"
그렇게 일본은 전례없는
공동개최를 제안하며
일본이 월드컵 개최에 실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으려하였다.
한국은 일본의 제안에 상반된
의견으로 갈렸다.
한국
"갑자기?"
어떻게든 한국이 월드컵을 단독으로
개최해야한다는 초강경파와
"우리가 더 유리한데 왜
일본 입장을 봐줘야하는거임?"
만일 개최지 선정 투표까지 가면 한국이
질 수도 있다는 유화파로 나뉘었는데
"아냐...아직 우린 월드컵 인프라도
모자르고 국제 정세상 일본을 더 알아줌"
월드컵 서포터 정몽준 회장은
한국 단독 개최를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정몽준
"시간만 더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니까"
하지만 국내에서도 과연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한국이 이길지 의견이 분분했다.
만일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투표에서 패배하면?
한국은 시간과 돈을 쏟고도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 보릿자루 신세가 될게 뻔했다.
정부 각처의 고민은 깊어져갔고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 1996년, 일본의 공동개최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영삼
"좋아 공동개최해보지 뭐"
김영삼
"정회장 그래도 이정도면 정말
많이 온거야 더이상 너무 힘쓰진 말자고"
정몽준
"...알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한국은
FIFA 집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한다면
2002 월드컵을 공동으로 개최할
의향이 있다고 타진하였다.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인지라 지금
투표로 한국과 붙으면
일본이 과연 이길지
확신할 수 없었다.
1996년, FIFA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만장일치로 유례없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발표하였다.
FIFA
"양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
한 국가가 월드컵을 개최하면"
FIFA
"다른 국가는 엄청난 좌절감에
빠질 우려가 있기에"
FIFA
"2002 월드컵은 일본 한국 양국이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공동개최만 본다면 한국과 일본이
반반 간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은 6년 전부터 월드컵을
준비하며 혼신을 다했고
한국은 일본보다 3년이나 늦게
준비해놓고 결과가 같았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둘만한 이득이었지만
한국
"이정도면 나쁘지않지 "
일본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답답한 상황이었다.
일본
"개손해"
공동개최가 발표되었을 때
일본 유치단의 침울한 분위기는
한국의 강세와 일본의 전략 실패,
계속된 삽질의 결과였다.
한편 월드컵 공동개최 소식을 들은
정몽준 회장의 아버지
정주영 회장은 결과를 듣고서는
정주영
"우리 몽준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라는 핀잔 섞인 말을 했다.
"그래도 정몽준 회장이 얼마나
많은걸 해냈는데"
"너무 기운빠지게 말하는거 아님?"
"정주영 회장은 일본이 가져갈뻔한
88올림픽을 따낸적이 있으니까"
"저 말도 정주영 회장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건 인정"
많은 어려움을 깨고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공동개최가 성사되었지만
공동개최라는 애매한 결과에
두 나라 모두 만족하지는 못하였다.
일본은 단독 개최를 실패한 것도
억울하니 월드컵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결승전만큼은 일본이 가져가야겠다고
주장했고 한국은 이에 맞써
두 나라가 공평하게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하였다.
일본
"지금 내 기분이 그래...어이가 없네"
일본
"그니까 결승전만큼은 절대
양보못해"
한국
"그런게 어딨냐 추첨으로 가자
옛날 본성 나오지 말고"
그리고 양측이 만나 실무진의
회담을 거친 결과
한국
"개막식이랑 개막식전, 본선 조 추첨식,
대회 공식 명칭 우선권은 우리가 가져가고"
일본
"지역 예선 조 추첨식, 결승전과 폐막식은
우리가 가져간다"
즉 한국은 월드컵 명칭을 가져가고
일본은 결승전을 가져간 것이었다.
이 사안을 두고 실제적 이득이 큰
결승전을 일본이 가젼간 것이
과연 잘 합의한 사안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았지만
한국은 국민 정서상 '일한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에 거부감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
"일본이 앞에 오는 순간 조상님들
관짝 열고 뛰쳐나오신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그렇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다.
하지만 이때 FIFA는 월드컵 명칭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FIFA
"흠 알파벳 순서상 J가 K보다
먼저 오는데"
FIFA
"월드컵 명칭을 Japan/Korea가 아니라
Korea/Japan으로 하겠다고?"
FIFA
"너네끼리만 축구함?
다시 생각해보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국으로서는 명칭까지
내줄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때 정몽준 회장이
재의견을 냈다.
정몽준
"FIFA를 풀어서 써보면"
정몽준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국제 축구 연맹)
정몽준
"프랑스어가 기원이지 않습니까?"
정몽준
"그럼 당연히 프랑스어를 우선으로
따라야하는데"
정몽준
"한국은 프랑스어로 'Coree'
이기 때문에"
정몽준
"궁극적으로 Korea/Japan이
맞습니다"
FIFA
"이야"
정몽준 회장의 주장에 FIFA는
이를 받아들여
월드컵 공식 명칭은 어떤 언어로 써도
Korea/Japan으로 확정되었다.
월드컵은 공동개최로 끝났지만
두 국가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전을 벌이며 갈 길이 멀어도
여전히 삐걱거렸다.
공동개최라는 같은 이불아래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준비태세
94년 월드컵 진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축구 한일 결승전 승리,
그리고 2002 월드컵 공동개최
최종 유치까지.
일본보다 늦게 월드컵을 준비했지만
호기롭게 상승세를 달리던 한국은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며
위기를 맞이한다.
월드컵 개최를 적극 지지하던 국내 여론은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고
국제 사회에서도 한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한국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나라 망하게생겼다"
FIFA
"너네 월드컵 잘 준비할 수 있겠니..?"
그럼에도 한국은 월드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정몽준 회장은 1995년에
대한축구협회에 낸 회비만
43억 7000만원이었는데 총 회비가
57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협회 자금의 약 77%를 정몽준 회장
혼자 충당한 규모였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레슬링협회에
12억 7000만원을 충당한 것과 비교하면
지금이나 그때나 엄청난 자금을
지원해 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002 월드컵 유치 성공 이후에는
축구 회관을 새로 건립하고
정몽준
"이렇게 비좁은 사무실에서 월드컵을
준비할 수는 없다"
공사비 170억원 중 65억원을
자비로 충당하였다.
"앞서 말했듯 대한축구협회
총 회비가 57억원인데"
"축구 회관 건립비로만 170억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는거!"
또한 현대중, 현대고, 울산대, 현대 청운중,
현대 정보 과학고, 울산 과학대,
울산 지역 초등학교 7곳과 중학교 3곳,
고등학교 1곳의 축구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미래 축구
산업도 육성하고자 하였고
초등학교 축구대회, 중고교 주말리그,
조기 축구 대회 처용컵,
심지어 어머니 축구대회까지 개최하며
총 5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다.
"와우"
월드컵을 위해 뛰어든 인물은
정몽준 회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한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앞에 두자
외신에서는 이런 보도가 나오며
한국을 놀리는 기사가 퍼졌다.
"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볼모지
한국에서"
"월드컵 2회 연속 본선 진출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때는 전용 구장은 커녕
잔디 구장조차 하나도 없어
육상 트랙이 있어도 잔디가 있다면
감지덕지하며 축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 보도를 보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은
화를 내며 관계자들을 호출하였다.
박태준
"얼마가 들어도 좋다"
박태준
"당장 쓸만한 축구 전용 구장
하나 건설해라"
국내에서는 축구 전용 구장을
지어본적이 없었던지라
해외 유명 업체의 공사법을
발품팔아가며 기술을 배워왔고
국정 감사와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110억원을 투자해 국내 최초
축구 전용 구장을 신설하였는데
바로 포항 스틸야드이다.
그리고 이때 지어진 포항 스틸야드는
월드컵 유치에 굉장한 무기가 되었다.
1995년, 월드컵 개최 문제로
한창 머리 아플 시기에
FIFA 실사단이 방한하여 한국의
축구 인프라 상태를 확인하고자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인
잠실종합운동장을 보여주었는데
FIFA
"아니 기껏해야 11년전에 세워진
잠실종합운동장이 전부네?
FIFA
"이거 말고 축구 전용 구장 없음?"
FIFA
"축구 전용 구장도 없는 나라가
월드컵을 어떻게 개최하겠다는 거임?"
FIFA 실사단이 실망하며
난처한 상황에 빠진 그때,
박태준 회장이 정몽준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FIFA 실사단을 포항으로 안내하라고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갓 지어진 포항 스틸야드를
보여주자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에도 수준높은 축구 구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FIFA 실사단이 대단히 만족해하며
돌아간 것이다.
FIFA
"Very Good"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어난
값진 월드컵이기에
모두의 걱정만큼이나 기대도
커져갔다.
이제 한국에게 남은
결정적인 준비는 단 하나,
한국 축구를 앞세워주고 축구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줄 한 사람,
후대에도, 앞으로도 이름이
오르내릴만큼 시대가 원하는 사람,
모두가 기억하는 그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20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지못할 2002 이야기 (김병지 드리블 사건+히딩크와 협회의 갈등) (0) | 2021.11.06 |
---|---|
잊지못할 2002 이야기 (히딩크와의 만남+히딩크 반말 프로젝트) (0) | 2021.10.26 |
잊지못할 2002 이야기 (도하의 기적과 비극+월드컵의 자격) (0) | 2021.10.19 |
잊지못할 2002 이야기 (월드컵 개최권 전쟁+FIFA 정치 싸움) (2) | 2021.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