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강했다
BC 480년 9월.
좁은 협곡안에 사나운 숨결이
불어닥쳤다.
노려보는 그들의 눈은 불탔고
움켜잡은 그들의 손은 강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십만 대군의
최강의 적 페르시아군이었고
눈 뒤로는 가족을 지키기위한
1400여명의 전사들이 있었다.
1400여명.
테베인 400여명과 테스피아인 700여명,
그리고 스파르타인 300여명.
수십만 대군을 상대하기는 절대
싸움조차 되지 않는 숫자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스파르타
300명의 전사들이 있었다.
페르시아군이 물밀듯이
부수고 들어오자
그들은 방패를 앞세우고 창을
사이에 찔러넣으며
마치 절벽처럼 버티면서
죽이고 또 죽였다.
창이 부러지자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았다.
칼이 부러지자 돌을 집어
적들을 부수었다.
그마저도 안되면 날아오는 화살에
몸을 던져 동료를 지켜내었다.
스파르타가 뚫릴 듯하다가도 방패 진영이
다시 적들을 몰아붙이며 살아나고
앞선 사람이 지칠때면 뒤선 사람이
뛰어나와 대신해주며 버텼다.
창끝에 메달린 페르시아군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니
전투를 지켜보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격렬한 전투앞에서 세번이나 의자에서
일어날 정도로 그들의 전투는 엄청났다.
크레르크세스는 자신이 가진
최강의 전사이자
죽지않는 불굴의 전사
임모탈을 투입시켰다.
하지만 임모탈의 등장에 조금씩
진영이 붕괴되는 듯하다가도
전사들은 다시 방패를 들고 다시
죽이고 또 죽이며 다시 버텨내었다.
성벽 끝에 몰려 테베인들은
결국 항복하였지만
스파르타 전사들 만큼은
결코 항복을 몰랐다.
격렬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전사하였다.
스파르타 전사들은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의 시체를 지키기위해
그 자리 근처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며 혈투를 벌였다.
보다못한 크세르크세스는
궁병대를 불러
스파르타 전사 모두가 죽을때까지
화살비를 퍼부었다.
그렇게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그곳에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대에는 이 전투를 이곳의 이름을 따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불렀으며
페르시아군이 물러나자 레오니다스 왕이
죽은 그 자리에
스파르타 전사들의 불굴과 용맹을
기리며 사자 상을 세우고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그리스를 위하여 다 함께 싸웠고
다함께 죽었나니,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가거든 이 말을 전할지어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스파르타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면서
역사 속 스파르타의 이미지를 만든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이렇게나
강하다고한들
훗날 그리스의 패권을 다투기위해
아테네와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테르모필레와 같은 장렬한 이야기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토록 강했던 스파르타는 왜
조금씩 쇠락했고 결국 사라졌을까?
강한 전사를 위해
기원전 17세기 화려한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에 꽃피웠다.
이들은 궁전을 만들고 신화와
신전을 만들며 문명을 자랑했는데
흔히 알려진 트로이 전쟁도 미케네
문명과 트로이 문명이 충돌한 역사이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2세기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에게 유린당하며
결국 멸망하였는데
이때 도리아인들이 정착한 곳중
하나가 바로 스파르타였고
스파르타의 역사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스파르타라는 국가의 근본은 결국
침략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기때문에
자신들이 침략해서 만든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원래 살고있던 원주민들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복속시키며
그들이 뭉쳐서 대항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힘을 가져야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너무 많았고
자신들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을 '헤일로타이'라는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자신들은 끊임없이 군사력을 기르며
이들을 지배할 시민이 되었는데
스파르타의 인구 90%가 노예이고
10%만 스파르타 시민인
기형적인 신분 구조는 바로
이런 이유로 비롯된 것이었다.
10%의 스파르타 시민은 90%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오로지 군사 훈련에만 집중하고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다시말해 스파르타 성인남성
100%가 모두 백수였다는 것이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건 90%의
노예 계급이었다.
한쪽에서 영웅놀이를 하려면 다른
한쪽은 뼈빠지게 일해줘야 했다.
스파르타에는 장애인이나 몸이
약한 자가 없다.
왜냐하면 아기가 태어나면
5명의 검사관이 검사하여
장애가 보이거나 너무 작게 태어난
아기는 절벽에 떨어뜨렸고
여자아이의 경우 16세 이후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으면
역시 똑같이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7살이 되면
집단학교에 들어가 무술을 배웠다.
이름하여 '아고게(Agoge)'.
가족과 떨어져지내는 것은 물론
부모의 품에 안길 수도 없었다.
집단학교에 입소하자마자
발가벗겨 채찍질을 당하였다.
여기서 비명을 참는 아이는 들어가고
울거나 비명을 지르면 계속 더 때렸다.
집단학교의 환경은 매우 열악해서
식당은 커녕 침대도 없었다.
이부자리를 마련하려면 아이들이
직접 풀을 따와 깔아야했는데
여름은 그렇다쳐도 겨울이되면
혹독한 추위에 얼어죽기도하였다.
그렇다고 절대 이불을 주지는 않았고
오히려 풀침대에 가시를 섞었는데
한겨울에 깊이 잠들면 저체온증으로
얼어죽어도 자각을 못하니
가시에 찔려 중간중간에 강제로
잠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엄청난 훈련은
부상과 질병에 노출될 수 밖에없었다.
하지만 목욕은 사치라서 1년에
몇번 씻지도 못해 위생이 엉망이었다.
24시간 중 10시간을 군사훈련에
돌입해야했다.
창검술, 방패술 등을 익혔는데
정확히 대열을 유지하며
음악에 맞추어 신속하게 진영을
바꾸고 팀워크를 맞추었다.
이외에도 독초에 대한 면역을
기른다고 약간의 독초를 먹기도하고
1:1로 레슬링을 겨루며 평가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12살이 되면 자신이 입던 옷을
반납하고 망토를 받았다.
"그렇다고 영화 300에 나오는
알몸에 붉은 망토를 걸친 것은 아니야"
"영화와 달리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갑옷을 입었고"
"붉은 망토는 색 염료가 비싼
희귀 물품이었어"
15살이 되기 전에 스파르타
집단 학교 아이들은
1년에 한번 꼭 받아야 하는
훈련이 있었는데
나무에 묶고 채찍으로 피가
터질때까지 때린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피부를 약하게
만들어 자갈 밭에 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연한 피부가 터져나오는데
이때 찬 강물에 들어가 피부를 식혔다.
피부는 때리면 때릴수록
더 강해진다는 믿음때문이었다.
물론 굳은 살이 생기고 외상에 대해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이 생기기에
스파르타식 훈련이 아주 틀린 훈련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런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받아도
금강불괴가 되는것은 아니었다.
스파르타 전사들도 결국
사람인지라 전투에 나가서
칼과 창에 베이면 피부 단련
훈련을 받아도 다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16살이 되면 밥 배식이
하루 한끼로 줄어들었다.
"오잉?"
나머지 두끼는 알아서 구해
먹어야했는데
결국 훔치거나 뺏어먹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16살 훈련생들은 마을로
내려와 도둑질을 일삼았다.
물론 음식을 훔치다 걸리면
죽도록 맞았다.
그런데 음식을 훔치다 걸려서
맞는 것이 아니고
훔치는 것을 들켰기 때문에
그 죄로 맞았다.
"할거면 제대로 할 것이지
멍청하게 도둑질을 들켜!"
그러다가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를 만나면
훔치는 것은 물론 죽여도된다고
권장받았다.
"노예는 죽여도됨"
그렇게 20살이 되면 전사로서
인정받을 테스트가 남는데
바로 노예인 헤일로타이를 죽여
목을 베어 가지고 오는 것이다.
힘이 세고 인정받는 노예를
죽일 수록 더 큰 인정을 받았다.
"힘세고 똑똑한 노예를 죽여야"
"장차 반란의 씨앗을 없애는 것임"
실제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수 차례 있어서
20살 전사들을 이용해 이들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려고하였다.
노예를 잡았다면 이제 산에
창을 들고 올라가 사냥을 하였다.
여기서도 역시 사납고 강한 육식동물을
잡을수록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아고게 훈련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스파르타의 다음 왕으로 지명될
아들은 아고게를 받지않게하였다.
아고게 도중 사망하거나
불구가 생길 수도 있을 뿐더러
만약 왕의 아들이 아고게를
거부하거나 포기한다면
스파르타라는 사회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뭐? 왕의 아들이 아고게를 포기한다고?"
당시에도 아고게가 얼마나 가학적인지
알고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7살부터 20살까지 훈련이라는
고문을 받으며
도둑질과 살인을 권장받으면서
약육강식을 배운 스파르타 청년들은
그제야 비로소 전사라는
이름을 얻게된다.
그렇게 전사로 길러지면 30살까지
기숙사에서 공동 숙박을 하였다
결혼은 30세 이후에나 가능하여서
30살이 넘어 결혼을 하였어도
60세까지 공동으로 식사하며
군대 의무 복무를 해야했다.
그런데 육체적인 훈련에 비해
지식적인 훈련은 거의 미미했다.
간단한 계산과 글을 읽고 쓰는
정도만을 가르쳤는데
"생각이 많은 전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함"
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매우 강도높은 훈련을 말하는
스파르타식 훈련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식 훈련은 매우
비인격적이고 비효율적인데
이들을 전사로 기른 것은 피부
단련이나 인간 사냥이 아닌
죽음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인격 말살이 아닐까 싶다.
강한게 전부
스파르타는 국가 전체가
병영 수준으로 운영되다보니
한창 경제 활동을 할 청년들은
모두 군대에 징집되어있고
의식주의 개선이 크게 나아지지도,
나아질 이유도 없었다.
보리, 포도주, 무화과, 치즈 등을
식사로 먹기도하였지만
보통은 맛없기로는 세계에서 따라올
음식이 없다는 '멜라스 초모스'
일명 '검은 수프'를 부풀지 않은 보리빵에
곁들여 거의 매일 먹어야했다.
이게 얼마나 맛이 없냐면 이탈리아
남부 도시 시바라이트인이
이 수프를 맛보고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나는 스파르타 병사들이 그토록
즐겁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를 알아버렸다"
먹는 것의 즐거움은 단연 없었고
집도 원시단계에 머물렀다.
어느 날 스파르타의 왕이 아테네를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아테네의 네모 반듯한 기둥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파르타 왕
"이 나라는 네모난 나무가 자라는가?"
왕조차도 다듬지 않은 투박한 나무를
그대로 집을 지을 정도인 것이다.
그럼 스파르타가 돈이 많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스파르타는 화폐나
돈이 없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있기는 있지만
아주 조악하고 쓸모가 없었는데
스파르타의 법과 경제를 만든
리쿠르고스의 개혁 당시
무쇠를 달구고 식초에 담가 무쇠
경도를 낮춰서 무쇠 값도 안나가는
저급하고 가치도 없는 쇠막대를
화폐로 쓰도록 법으로 정했기때문이다.
스파르타 시민들의 사치와 타락을
막기위함이었다.
동시대 아테네와 지중해 도시
국가들은 은화와 금화를 사용하여
상업이 일어나고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스파르타는 전무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문명하면 떠오르는 하얀 신전과
각종 아름다운 유물들은 전부
아테네 것이지 스파르타는 전혀없다.
스파르타에는 비싼 신전도 없고
도시를 이루어 모여살지도 않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그정도로 스파르타는 문명이라 하기
의심될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투키디데스
"라케다이몬인(스파르타인)의 도시가
폐허가되고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투키디데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투키디데스
"과연 명성만큼의 실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까지 스파르타 경제가
척박한 이유는
스파르타의 경제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
'평등'이기 때문이었다.
여타 폴리스들이 무한하게 부를
축적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 개혁당시
9000개 가문이 9000개 영지를
똑같이 나누어 가져 모든 시민들이
비슷한 생활을 하게만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공산주의는
아니라서 사유재산이 인정되었으며
공동식사에서는 스파르타의
철제 화폐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많은 돈을 낸다고 더 많이 먹거나
더 좋은 생활을 하는것도 아니라서
다들 고만고만하게 평등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스파르타는 군사력하나는
최강으로 인정받는 국가였다.
아테네인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있는지
묻지 않는다"
아테네인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전쟁에 나가게 되면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방패를 들고 오던지 아니면
베고 오던지"
스파르타는 전투중 사망하면
전사자의 방패를 시체 머리에 두고
수레에 눕혀 전사자의 집으로
보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방패를 당당하게 들고 오던지
아니면 그자리에서 죽어서
방패를 베고 시체로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항복과 패배를 모르는 스파르타의
불굴 정신을 함축하는 말인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가학적인 육체 단련에 가난함과
검소함으로 길들여져
군사적인 실력과 정신력은
인정받았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소양과 교육을 등한시하고
문화를 방치한 결과
집단적인 행동에는 탁월했지만
개인의 사고능력이 저하되었으며
유연한 인지와 빠른 대처 판단이
불가능하였다.
역사 곳곳에 보이는 스파르타의
더딘 결정과 굼뜬 행동은
이같은 병영 국가 운영에 따른
부장용으로 나타났다.
아테네 전령
"지금 마라톤 평원에 페르시아 대군이
몰려와있습니다"
아테네 전령
"어서 구원군을 보내주어 그리스
세계를 구해야합니다"
스파르타 의회
"좋다 구원군을 보내주겠다"
스파르타 의회
"하지만 신탁에 따라 보름달이 뜬 후
출병할 것이다"
아테네 전령
"?? 보름달이 뜨려면 아직 15일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스파르타 의회
"그래도 신탁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또한 개인의 삶 자체가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스파르타는
다른 민족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고
이민족과 섞여 살거나 결혼하는 것도
극도로 꺼려하여서
문화적 유대나 상업적 교류도
전무하였으며
노예들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인간 사냥으로 유린하며
자연스레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고
스스로 고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토록 스파르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어도
정작 스파르타를 몰락시킨
원인은 따로 있었다.
돈의 멸망
스파르타의 경제 바탕은
평등이지만
재산에 관한 개인차가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할때면 신부는 지참금을
준비해야하는데
"너는 지참금으로 무엇을 낼것이냐?"
"제 아버지의 지혜입니다"
라고 말한 신부의 답변이
전해지는것처럼
재산의 개인차가 스파르타에도
존재했음을 암시해준다.
스파르타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리쿠르고스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리쿠르고스
"가난하게 살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마라"
다시 말해 스파르타의 힘은
가난하게 살지언정
궁극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여
격차를 없애는 것이었다.
모두가 똑같이 훈련받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
똑같은 전장에서 똑같은 힘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스파르타의 정신이자
근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스파르타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어버리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대표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써 모두 승리하였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위해
서로 간의 동맹 세력을 만들었는데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맺어졌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는
지중해 무역을 꽃피우며
일찍부터 무역로를 지키기위해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였고
3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살라미스 해전으로
페르시아를 완전히 이겨버린 역사를
만들 정도로 해군이 매우 강했다.
반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노예반란을
제압하기위해
엄청난 훈련과 규율로 무장한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테르모필레 전투,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크게 활약하여
스파르타는 최강 육군을
양성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
공동의 적이 없어진 두 동맹은
서로를 견제하며 동맹 세력은 곧
제국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살라미스 해전으로 페르시아를
완전히 박살낸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 제일로 군림하며
강력한 동맹과 힘을 차지하였고
이를 지켜보는 스파르타는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두 동맹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마찰과 사건으로 인해
결국 전쟁에 휘말리게되는데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투키디데스
"아테네가 강대해져 라케디아몬
(스파르타인)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투키디데스
"전쟁을 필연적으로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이 조금
웃기게 흘러갔다.
스파르타가 아테네로 몰려가면
아테네는 성벽을 쌓고
성안에서 스파르타가 물러날때까지
쭉 버티기만하였고
"육상에서 싸우면 당연히
아테네가 질게 뻔하기 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근처에 해군을 몰고가
약탈하고 방화하는 식이었다.
"스파르타는 해군이 거의 없으니
아테네의 공격을 그냥 구경해야하는 신세"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면서
쉐도우 복싱으로만 20년이 흘러가자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이기려면 결국
해군이 있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해군을 건설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해군은 배가 있어야하며
배에 소모되는 모든 부품은 돈이었다.
해군에 필요한 인력을 훈련하는 것도,
해군에 쓸 장비를 제조하는 것도,
해상에서 배로 진영을 짜고
적들과 싸우는 것도,
밧줄, 나무, 천과 같은 소모품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말 그대로 돈먹는 하마를 들이는게
해군을 건설하는 것이다.
결코 스파르타가 육상 전사를
키우는 것처럼
사람과 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는 돈이 없다.
애초에 아테네 해군이 강력한
이유도 지중해 무역으로
금은보화를 쓸어담기 때문인데
스파르타는 그런 것도 없었다.
스파르타의 선택은 간단했다.
동맹국들에게 세금을 거둬 강제로
비용을 분담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돈으로 스파르타는
엄청난 해군을 건설하였고
전쟁 말기에는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몰아내기 위해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시작하자
승기는 스파르타에게 기울었다.
그리고 BC 404년, 아테네가
마침내 항복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는
스파르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스파르타에게 남은 것은
부흥이 아닌 몰락이었다.
먼저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동맹국의 신뢰를 잃었다.
전쟁 내내 스파르타는 강압적인
태도로 동맹국들을
마치 식민지 다루듯이 대하며
폭정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중에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룰을 깨뜨린 유일한
국가가 스파르타였으며
아테네 몰락후 동맹국들을
차별대우하며 불신을 쌓았다.
아테네가 무너지고 그들이 남긴
문화와 정치, 예술 그리고 돈을
스파르타가 흡수하며 동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하였는데
이때 돈의 맛을 본 스파르타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만다.
바로 부패였다.
전쟁이 계속되며 스파르타로 흘러온
동맹국의 세금과 엄청난 돈은
곧 스파르타인에게 무한한
부패의 맛을 선물하였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들은
현지에서 뇌물을 챙기며 스파르타의
명성을 떨어뜨렸고
심지어 아테네 원정군을 궤멸시킨
스파르타의 명장
길리푸스같은 거물도 은화를
궤짝으로 싣고오다가 발각되어
외국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페르시아가 지원해준
엄청난 금화와
전리품으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황금은
일반 스파르타 시민들마저
부패시켰고
돈의 맛을 알게된 스파르타는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돈을 위해 자신들의
영지를 팔아치우기 시작하였다.
리쿠르고스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영지를 팔아 치우자
소수에게 영지가 몰리며 결국
빈부격차가 발생하였는데
전체 가문중 100개 가문, 고작 3%가
전체 토지를 독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부의 집중은 경제 격차를
더욱 가속하였다.
급기야 자식들을 아고게(Agoge)에
보낼 교육비도 지불 못하고
심지어 공동 식사 식비도 못내는
시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고게는 커녕 공동 식사비도
지불못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으로서 명예와 자격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 역사상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전례없는 빈부격차의 발생으로
그렇게 추구했던 평등이 무너졌고
평등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스파르타의 근간이 흔들렸다.
명예를 잃은 시민들은 더이상
스파르타 시민이 아니었고
경제가 무너져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며 더이상 감당할 수 없게되자
그들은 조국 스파르타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쳤다.
시민의 몰락은 곧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그리고 인구 감소는 그만큼 전사의
수도 줄어든 것이었고
그리스를 호령하던 최강 육군의 몰락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BC 640년에 스파르타 남성
시민들은 9000여명이었으나
300년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에 남은 시민은
단 3000명 뿐이었다.
그리고 BC 371년,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가
회복 불능수준에 도달하였다.
레욱트라에서 마주친 1만명의
동맹군과 스파르타군,
6000명의 테베군과 맞붙어
스파르타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왕
클레옴브루투스가 전사하였지만
스파르타군은 뒤도 안돌아보고
모두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약 100년전, 그들의 선조들이
테르모필레에서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지키기위해
수만의 페르시아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멸한 것과 너무 달랐다.
스파르타인들에게 자긍심이나
애국심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병력의 우위에도 스파르타군은
100년전과 비교해 질적으로 떨어졌으며
최강의 육군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쇠퇴한지 오래였다.
레욱트라 전투에 참가한
1만 동맹군중에
단 1000명이 순수 스파르타
시민이었는데
이들이 왕의 시신을 버린것도 모자라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 의회는 크게 격분하였으나
이들을 군법에 따라 사형할 수도 없었다.
이들마저 사형해버리면 그나마
1000명 남은 스파르타가
정말로 사람이 없어 멸망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스파르타는 두번 다시
그리스 패권국을 회복하지 못한채
BC 146년, 로마의 정복으로
스파르타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혹자는 레욱트라 전투의 패배로
스파르타가 쇠락하였다고 말하지만
그토록 강한 스파르타가 왜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하였는지 거슬러 생각해보면
전투의 패배는 결과일뿐
스파르타 쇠락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스파르타는 황금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삶을 칭송하였고
이는 곧 모든 그리스의
모범이 되는 정신이었다.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쳐 촛불처럼
싸워줄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그들의 전통이
그들의 힘이자 최고 가치였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맹주를
자처하며 폭정을 일삼았고
돈의 유입은 스파르타인들을
타락시켰다.
스파르타인들의 가난함은 돈에 대해
해탈하였음이 아니라
단지 돈의 유입을 막았을 뿐,
그들도 언제든 타락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 '토드 벅홀츠'는 국가의
쇠락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① 출산율 저하
축적된 부는 출산을 통한 생산력
유지를 약화시켜 출산율을 저하시킨다.
② 국제 교역의 확대
다각적인 무역은 국가 정체성을
소멸시킨다.
③ 채무 증가
부유한 국가는 더 많은 빚을 지고
이는 미래세대의 희생으로 이어진다.
④ 근로 윤리 약화
축적된 부는 노동 없이 생계를
유지시키고 근로 윤리를 쇠락시킨다.
⑤ 이민증가와 공동체성 소멸
저출산 부국에는 이민자가 유입되며
공통 목표 부재로 공동체성은 약화된다.
제시된 사례는 스파르타의 몰락을
그대로 나열해 놓은 것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 스파르타만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의
선례를 보고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현재 우리의 위치는 어디이고
우리는 어떠한가?
한낱 이야기거리에 불과한
오랜 고전일지라도
나의 상황에 대입하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되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된다.
필연적인 몰락인가
새로운 도약인가.
우리는 스파르타의 고민을 보면서
무엇을 배워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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