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이 글은 케네디 대통령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 중
마피아와 관련되었다는 일부 의혹만을
이야기 흐름을 위해 제시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결코 정설이 아니며
케네디 대통령과 관련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케네디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Patrick Kennedy).
그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1세대로
미국에서 술통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패트릭 J. 케네디(Patrick J. Kennedy)는
아버지의 일을 기반으로 술집을
경영하며 양조업에 진출하였고
양조 사업이 호황을 맞이하며
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양조 사업을 기반으로 큰 돈을
벌어 업계에 영향력있는
명문가로 거듭났는데 이를 기점으로
많은 명성과 인맥을 쌓았다.
그리하여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 J. 케네디는
1886년 메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1892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케네디가의 정계 진출은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Joseph P. Kennedy).
그 역시 가문의 사업이 된 양조 사업을
관리하며 사회에 자리잡았는데
그가 양조사업을 관리하던
1919년은 대 금주법 시대였다.
그리고 금주법 시대는 밀주 사업으로
동네 갱스터에서 기업형 조직으로 성장한
대 마피아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그리고 양조 사업을 하던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도
밀주의 제조, 유통, 판매 모든 거의
전권을 꽉 쥐고 있었던 마피아와
사업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리노이 마피아 대부
'샘 지앙카나'와 많은 친분이 있었다.
당시 주류 사업에 종사하던 거의
모든 사업가들은
마피아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였다.
금주법 시대가 끝나고 조셉 케네디는
이때 벌어들인 엄청난 자금으로
FBO 영화사를 사들여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도 하였고
결혼을 하였음에도
당대 최고 할리웃 스타
그로리아 스완슨과
깊은 관계를 나누었다.
1934년에는 미국 증권 거래소
초대 소장을 맡았으며
1938년에는 주영 미국 대사로
임명되면서
돈과 명예를 모두 쥔 말 그대로
상류 사회로 진출시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도와준 좋은 친구
마피아와 친분을 맺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아들
존 F. 케네디.
케네디 역시 선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사업가로서,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으로
살아가고자 하였다.
친구
케네디는 성공적으로 상원의원이 되고
명실상부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적이고
올드한 미국의 정치 분위기에서
젊고 유능하며 젠틀한 이미지를 갖춘
건실한 청년이 의원이 되었으니
기존 정치 풍조와는 다른 색다른
열기를 불러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1957년부터 대권 주자로
거론되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 케네디가 즐겨 찾던
휴양지가 있었는데
바로 쿠바였다.
당시 미국 고위층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명소는 쿠바였다.
서구권 문화와 비슷하면서
저렴한 물가와 다양한 볼거리,
그리고 미국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도박, 카지노, 매춘 등을 즐기며
그곳에서 비밀리에 모여 모임을
갖거나 인맥을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쿠바를 유흥의 도시로
알아보고 1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투자한 세력은
바로 마피아였다.
마피아는 미국의 고위층들이 오면
극진히 대접해주었으며
케네디 또한 극진히 모시며 더 좋은
방을 주고 호화 서비스를 주었다.
예를 들어 밤이면 케네디의 방에
3명의 여자를 들여보내
케네디를 밤마다 만족시켜주는
특급 서비스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코
공짜가 아니었으니
한마디로 케네디는 마피아에게
암묵적인 빚을 진 것이었다.
1960년이 되자 미국은 역대 가장
치열한 선거에 휘말리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가 단 0.16%
겨우 11만 2881표차로
상대 후보였던 닉슨을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다.
0.16% 표차를 만들어낸 도시는
바로 일리노이와 텍사스였다.
그런데 일로노이와 텍사스는 옛부터
공화당을 지지하는 도시였고
이곳에서만큼은 닉슨이 케네디를 무조건
이기는 닉슨의 텃밭이었다.
그럼에도 민주당 케네디가 이 도시에서
승리하여 승패를 가른 것이었다.
하지만 케네디가 위 도시에서
선거를 승리하였더라도
결정적으로 당시 분위기상
케네디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또는 케네디가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케네디와 상대 후보 닉슨의 라디오 토론을
청취한 미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 케네디가 잘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21%에 불과할 정도였으며
TV 토론을 시청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케네디가 잘했다는 응답 30%, 닉슨이
잘했다는 응답 29%로 산출되며
케네디가 닉슨을 압도적으로 눌러
분위기를 잡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미국 대선의
승패를 좌우하던 가장 큰 도시
오하이오와 캘리포니아는 상대
후보였던 닉슨에게 돌았갔다.
그리고 케네디가 카톨릭 신자인것도
큰 반감으로 작용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중 카톨릭 신자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카톨릭을 믿는 대선 후보로는
알프레드 스미스가 있었으나
1928년, 상대였던 후버에게 패배한
선거 역사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는
개신교가 아니면 공략이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불리했지만 그럼에도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런 행보에 1960년 대선은 곧장
엄청난 의혹에 휩싸이게 되었다.
승패를 가른 일리노이와 텍사스 중
일리노이를 보면
일리노이는 시카고 마피아의 보스
샘 지앙카나의 영향 아래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샘 지앙카나는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때부터
밀주 사업과 같은 비즈니스를 통해
케네디가와 친분을 쌓았던 친구였다.
조셉 P. 케네디는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 활발해질 무렵에
뉴욕 펠릭스 영 레스토랑에서
마피아 보스들과 화합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샘 지앙카나도 있었다.
화합의 목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아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니
적극적으로 도움을 달라고 협조를
구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 마피아 보스들은
케네디보다 닉슨을 선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준다면
케네디는 마피아에게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바로 쿠바를 수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마피아가 쿠바 혁명으로
엄청난 돈을 날리고 도망쳐온,
마피아의 잃어버린 꿈이자 보물선인
바로 그 쿠바를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피아 보스들은 케네디를
돕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했고
특히 조셉 P. 케네디와 친분이 있던
샘 지앙카나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화합이 끝나고 얼마 후
선거가 치뤄지자
케네디는 샘 지앙카나가 지배하던
일리노이에서 237만7846표를 득표,
닉슨은 236만8988표를 얻으며
고작 8858표 차이로
닉슨은 패배하고 간신히 케네디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리노이에서 케네디의 승리가 들리자
닉슨은 당혹감을 감추지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일리노이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많았고
민주당 케네디보다 닉슨을 더 선호하던
도시 중 하나였기때문이었다.
그러자 향간에서 마피아 샘 지앙카나가
일리노이 노조원들을 이용해
케네디에게 몰표를 주었다는
의혹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의혹은 비단 일리노이
뿐만 아니었다.
닉슨의 텃밭이었던 텍사스에서는
46247표 차이로
오히려 닉슨이 패배하고 케네디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개표가 끝나자 다수의 도난 투표용지와
가짜 유권자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카고에서는 케네디를 뽑은
56명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며
기자가 등록된 주소로 찾아갔을 때는
집이 모두 헐어있었다.
모든 결과가 이상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부정선거 논란이 일자
일리노이에서만 677명이 선거
부정 행위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 장관은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였고
법무부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소된 전원을 석방하였다.
닉슨은 부정선거 의혹에 관해 재검표를
요청할 수 있었으나 실행하지않았다.
닉슨
"내가 선거 결과에 불복하면
이 나라가 분열될 것이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직위,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에 누가 될 것이다"
닉슨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닉슨은 1984년이 되서야
CBS TV 회견에서
케네디와의 대선을 이렇게
시인하였다.
닉슨
"60년 대통령 선거에 케네디의
부정이 있었다"
닉슨
"선거때 일리노이와 시카고 등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있었고"
닉슨
"이는 모두 케네디 쪽에서
저지른 것이었으며"
닉슨
"그 당시 투표자들 수가 선거인명부에 기록된
선거인의 2배나 되는 선거구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모든 것은 그저 의혹일 뿐이었다.
그렇게 케네디와 마피아의 관계는
지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실패와 책임
하지만 케네디의 약속과 다르게
미국의 쿠바 침공은 실패하였다.
랜스키는 엄청난 실망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앞으로의 케네디와 마피아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해볼 정도였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도
완전히 극으로 흘러갔다.
카스트로는 분노에 차올라서 라디오
방송으로 몇시간 내내 연설을 퍼부었으며
피델 카스트로
"미국은 홀로 큰 착각에 빠져
우리를 파멸시키려했다!"
피델 카스트로
"하지만 쿠바의 인민들과 나는 이에
마땅한 힘으로 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피델 카스트로
"다시 이런일이 반복된다면 미국에게
더 큰 깨달음을 줄 준비가 되어있다"
침공 4달 후인 1961년 8월에는
우루과이에서 열린 경제회의에서
케네디 보좌관 리처드 굿원에게
쪽지를 건네며 심기를 말하였다.
'침공을 당하기 이전 쿠바 혁명은 약했으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고맙다.'
한편 피그만 침공의 실패로
케네디도 완전히 격분하였다.
자신이 그토록 못미더워했던 작전을
CIA의 호언장담만 믿고 진행하였다가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국제사회의
망신거리, 카스트로의 온갖 조롱을 받고
53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포로를 송환받으며
작전 실패의 책임을 자기 혼자 지고
정치 생명의 사활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케네디 취임 후
고작 3개월만의 일이었다.
케네디는 작전의 책임을 물어
CIA국장 앨런 덜레스와
CIA 부국장 찰스 카벨을
해임시켰다.
또한 1961년 6월에는 CIA의
비밀 작전권을 회수해
앞으로 모든 작전은 합동참모본부가
지휘하도록하는
국가보안행동법 55호에 서명하여
CIA의 힘을 꺾어놓았다.
존 F. 케네디
"CIA를 1천개 조각으로 찢어 허공에
날려버리겠다!"
게다가 공산화 직전이었던 라오스에 대한
미군 파병을 철회시켜버렸고
1963년 10월에는 NSAM 263호,
국가 안보 행동 기록 263호에 서명하여
1965년 말까지 베트남에 주둔한
모든 미군을 철군하도록 명령하여
사실상 베트남 공산화 문제에서도
손땔 것을 결정하였다.
냉전이 정점을 찍던 시절,
케네디의 소극적인 대외전략은
케네디와 CIA 그리고 카스트로,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케네디를 향한 마피아의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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