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마피아 연대기 14 (피그만 침공과 CIA 공작+노스우스 작전)

글사람. 2021. 8. 2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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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명:------   

 

1960 3, 미국 중앙정보국 CIA

한가지 문건을 백악관에 승인요청하였다.

 

문건의 이름은 작전명: 자파타.

 

쿠바 혁명이 성공하였으니 잠재적으로

미국의 적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쿠바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특수 부대를 만들어

쿠바에 침투시키면

 

쿠바 내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미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규합되고

 

결국 쿠바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자는게 핵심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고심 끝에 이 작전을 승인하여

작전 지원을 지시하였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좋아 실행해봐"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뽑아

2506 여단을 창설,

2506 여단

 

과테말라에 비밀리에 캠프를 만들어

훈련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1960 11, 아이젠하워 다음

대통령으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면 케네디는

이 작전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겨

 

작전의 실행은 커녕 취소까지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F. 케네디

"이건 미국이 나서서 다른 나라에

공작을 펼치겠다는 것아닌가"

 

 F. 케네디

"물론 그럴수 있다고 해도 쿠바를

지켜보는 나라가 너무 많아"

 

 F. 케네디

"미국이 그랬다는게 드러나면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게 분명해"

 

 F. 케네디

"게다가 민중봉기라니. 봉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작전이 실패하는게 뻔한데"

 

 F. 케네디

"왜 확실하지 않은 수에 배팅을 하나?"

 

CIA

"하지만 대통령님, 이미 국무처와

펜타곤까지 이 작전에 개입되어있고

(펜타곤-미 국방부의 별칭)

 

CIA

"작전에 들어간 비용이

1300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CIA

"그리고 침공이 있기 전에 CIA

쿠바 내 반정부 인사들이 접촉하여"

 

CIA

"민중 봉기까지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작전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F. 케네디

...”

 

그런데 1961 3, 이번에는 펜타곤에서

새로운 작전 승인을 요청했다.

미국방성-건물 모양이 오각형이라 별칭이 펜타곤

 

펜타곤이 제시한 작전은

작전명: 노스우스,

 

작전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국 여객기가 쿠바에 의해서

격추된 것으로 위장해서 쿠바를 침공하자.

 

 미국 여객기를 납치해서 미국

주요 도시에 폭파시키고

 

쿠바에 의한 자살 폭탄 테러로

위장해 쿠바를 침공하자.

 

 마이애미에서 쿠바인으로 위장한

테러범이 총기 난사를 일으켜

 

미국 시민을 죽이고 쿠바에

뒤집어 씌어 쿠바를 침공하자.

 

 F. 케네디

“...”

 

케네디는 이 작전 브리핑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F. 케네디

다들 완전히 정신 나갔군

 

미국이 쿠바를 침공할 명분이 없으니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작극을 벌이고

 

그것을 모조리 쿠바에 뒤집어 씌어

쿠바를 침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펜타곤의

노스우스 작전에 케네디는 크게 실망하여

 

이전에 고민하던 CIA가 제시한 자파타 작전이

차라리 훨씬 나아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국 펜타곤이 올린

노스우스 작전은 배제시켜

 

1961 4, CIA의 호언장담을 믿고

CIA가 올린 자파타 작전을 승인하였다.

 

분명한 것은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실패와 성공   

 

케네디는 자파타 작전도 상당히

마음에 안들었지만

 

다른 미친 작전을 실행하느니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F. 케네디

대신 작전에 미국 정규군을 투입하는건

절대 안됩니다

 

CIA

옛썰

 

자파타 작전의 핵심은 쿠바에 침투하는

게릴라와 미국과의 관계과

 

완전히 철저하게 상관없다는 듯이

꾸미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이 직접 참전하는 것도

극도로 꺼려하였고

 

미국산 무기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가장 조심했다.

 

"미국이 쿠바를 상대로 공작을 꾸몄다는게

국제 사회에 드러나면"

 

"미국이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킨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을테니까"

 

자파타 작전은 쿠바에 게릴라군을 투입해

혼란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그 규모가 커지며 미 공군이 비밀리에

지원하는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변했다.

 

상륙하는 장소는 쿠바 수도

하바나에서 100km 떨어진

 

'피그만(Bay of Pigs)'으로 선정되었다.

피그만 위치

 

"상륙지가 피그만으로 결정되면서"

 

"대중들에게는 자파타 작전보다

피그만 침공작전으로 더 유명해져"

 

작전의 규모와 역할이 더욱 커진만큼

더 자세한 최신의 정보가 필요했다.

피그만 침공 기밀 문서

 

동시에 하위 정보부터 고급 정보에 이르는

모든 소스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최근까지 쿠바 상류에서 내부 정보를

훤히 꽤뚫고 있는 세력이 필요했는데

 

바로 마피아였다.

 

미국은 작전 성공을 위해 정보가 필요했고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마피아가 필요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마피아를

필요로했던 '언더월드 작전'처럼 말이다.

(언더월드 작전, 허스키 작전)

 

마피아 역시 케네디가 필요했다.

 

작전대로 쿠바 침공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케네디가 마피아들의 잃어버린 보물선을

되찾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만 된다면 마피아는 다시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케네디는 대통령으로써

정치 생명과 국가의 사활을 걸고,

 

마피아는 최고 이익과 조직을두고

서로 다른 두 시선은 다시 쿠바로 모였다.

 

하지만 작전이 진행될 수록

뭔가 이상했다.

 

뉴욕 타임즈는 작전이 개시되기

3개월 전에 

 

쿠바에 대대적인 군사 작전이 

있을것이라는 기사를 보냈고

 

뉴욕 타임즈

"미국은 곧 쿠바에 대한

군사 행동이 있을 것이다"

(1961년 1월 기사)

 

당시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쿠바 침공을 공공연히 발언하였다.

 

앨런 덜레스(CIA 국장)

"수 개월내에 쿠바의 공산 정권은

무너질 것"

 

게다가 지속적으로 쿠바에 게릴라를

침투시켜 공작을 벌이는게 발각되자

 

아무리 약한 쿠바 혁명 정부더라도

낌새를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쿠바

"이놈들 곧 뭔 짓을 하겠구나"

 

미국이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쿠바는

해안선을 철통같이 경계하였다.

 

그리고 쿠바는 어쩌면 멸망할지도

모르는 잔인한 운명에 맞써야했다.

 

 

 

   작전 개시   

 

1961년 4월 15일 새벽.

 

"콰쾅!!"

 

국적 마크가 지워진 A-26 공격기가

쿠바의 공군 기지를 공습하였다.

 

쿠바군

"적의 공습이다!"

 

국적 불명(?)의 이 공격기의 막강한 화력으로

쿠바 공군은 괘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공습 소식을 들은 카스트로는 바로

전면전을 선포,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며 나름대로

준비한 모든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10만명의 

반정부인사를 모두 체포 구금하였다.

 

카스트로

"너넨 조용히 있어라"

 

그렇게 기나긴 긴장 속에서

4월 17일 새벽,

 

쿠바 피그만 해안에 정체불명의 

7명이 바다에서 올라왔다.

 

이들은 CIA 소속 수중 침투조로

해안 수색 후 '장애물 없음' 신호를 보내자

 

한 시간 뒤, 4척의 거대한 수송선이 나타나

피그만 해안에 1400여명 병력을 쏟았다.

피그만에 상륙하는 침공군

 

그런데 같은 시간 쿠바군 순찰 차량이

이 모습을 발견해 총격을 울렸고

 

"타타탕!"

 

쿠바군

"적이다!"

 

새벽의 고요함이 찢어진 채 쿠바군 무선을 통해

침공이 시작됨이 순식간에 퍼졌다.

 

쿠바군

"연대규모 병력이 피그만에 상륙함!

속히 지원바람!"

 

그러자 쿠바의 해안 방어선에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병력이 투입되었고

 

그 수가 침공군의 10배에 달하는

14000명에 이르었다.

 

쿠바군은 해안을 봉쇄하고 소련에서

지원받은 T-34-85전차를 동원하여

 

해안선에 포격을 퍼부었고 최정예 공수부대까지

투입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또한 이 전에 있던 공습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쿠바 공군이 출격하여

 

중화기를 실은 침공군의 수송선을 격침시키며

전세는 완전히 쿠바군에게 기울었다.

 

"쾅!!"

 

침공군

"본부! 적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함!

추가 지원 바람!"

 

침공군은 이 순간을 위해 1년을 넘게

훈련을 받아왔지만

 

10배가 넘는 병력차에 예상치 못한 

적의 공습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포격을 가하는 쿠바군

 

심지어 침공군의 일부는 C-46, C-54

수송선을 타고 공수작전을 벌였지만

 

이 또한 쿠바군의 저항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침공군은 이렇다할 대비도 없이

그저 해안 바위에 몸을 숨기기바빴다.

 

지휘, 통신, 규율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였다.

 

4월 18일 아침,

침공군은 항복하였다.

 

전사자 114명, 부상자 360명

나머지 전원은 포로로 붙잡혔다.

 

작전개시 3일만이었다.

 

 

 

   실패의 책임   

 

피그만 침공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먼저 침공군이 상륙한 피그만은

드넓은 뻘지대였다.

 

상륙에 성공하였더라도 재집결 장소가

뻘지대인 이유로 집결에 차질이 생겼고

 

상륙 후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혀

아무 반격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작전 수립 당시 CIA는 쿠바의 해안지도를

철저히 분석했지만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CIA가 사용한 지도는 무려 50년 전에

찍은 해안 지도였기 때문이다.

 

4월 15일 새벽에 있었던 공습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2차례 공습이 있어야했다.

 

그런데 불구하고 공습은

단 한 차례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전 하루 전에 계획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길 패트릭(국방 차관)

"이미 1차 폭격을 가했는데 한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을 마치고"

 

길 패트릭(국방 차관)

"재차 폭격을 가하면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것이 알려지게된다"

 

당시 국방 차관이었던 '길 패트릭'은

어떻게든 미국의 지원을 숨기려했지만

 

이 때문에 살아남은 쿠바 공군이 출격해

침공군에 공습을 퍼부어

 

수송선이 격침되고 침공군이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침몰하는 수송선

 

당시 공군 참모 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는

 

2차 폭격은 물론 침공군을 위한

대규모 공중 지원도 계획하였으나

 

작전 하루 전날에 길 패트릭 국방 차관의

결정을 보고 받고는

 

커티스 르메이(공군 참모 총장)

"우리는 해변에 상륙한 놈들의 목을

벌써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피그만 침공이 개시되면 CIA와 접촉한

쿠바 내 반정부 인사들이

 

민중 봉기를 일으켜 쿠바에 혼란을 

가중시키려고 계획했으나

 

카스트로는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반정부인사 10만명을 체포하며

 

혼란이 시작되기도 전에 누구보다

발빠르게 소요를 진압하였다.

 

카스트로의 행동은 소련의 비밀 첩보기관

KGB의 조언에 의해서였다.

 

KGB

"장차 쿠바에 소요 사태가 발생한다면

가장 먼저 반정부인사들을 체포하십시오"

 

KGB

"내부 혼란을 최우선으로 진압해야

외부의 적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피델 카스트로

"알겠슴다"

 

침공군 지휘부의 오판과 갈등,

작전 지원의 부재, 쿠바의 결집.

 

카스트로의 신속한 대처와 쿠바를

과소평가한 미국의 착각.

 

모든것이 작전의 실패를 말해주며

침공도 실패하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었다.

 

피그만 침공군의 사망자 중에 B-26

폭격기 미군 조종사 4명이 사망하였으며

격추된 폭격기

 

CIA 소속 요원 1명도 사망하였고

침공군을 이끌던 미군 교관도 포로로 잡혔다.

 

물론 침공군의 배후에서 그런 엄청난

지원을 쏟아 부을 존재가 미국뿐이었지만

 

곳곳에 미국의 흔적과 미국인이 포로로

잡히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전세계에 미 정부와 CIA가 약속국을

대상으로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미국이 그토록 비밀로 하려고했던

치부가 드러난 셈이었다.

 

미국

"큰일났다"

 

카스트로는 이런 미국의 태도를 너무나

잘 알고 1961년 9월, 협상을 제시하였다.

 

피델 카스트로

"2800만 달러어치 대형 트랙터 

500대를 주면 포로들 석방해주겠음"

 

그리고 협상이 진행되자 부상 포로

60명을 미리 석방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당초 협상 금액이었던 280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어치 의료품까지 더해

 

총 5300만 달러 지원을 받고 1962년 말,

포로 1113명을 풀어주었다.

 

미국은 막대한 돈을 주어서라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포로를 반환받았다.

 

세계 최강 미국이 벌인 공작과 뼈아픈 실패에

모두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는 마피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케네디의 쿠바 침공 실패에 누구보다

실망한 것은 바로 마피아였다.

 

마피아는 케네디가 어린 정치인

시절부터 뒤를 봐주고 있었고

 

그만큼 케네디에게 붙어 공생하는 가운데

케네디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쿠바 수복 실패는 마피아와

케네디 간의 '약속'과 다른 이야기였다.

 

이제는 누구의

책임인가를 두고

 

마피아와 워싱턴의 정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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