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연대기 10 (카스트로 쿠바 혁명+존 F. 케네디와 마피아)
혁명의 움직임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다시 집권하였지만
국민 여론은 결코 좋지않았다.
바티스타가 무너뜨린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민주 정부였으며
친미 세력에 염증을 느끼던
쿠바인들에게
친미의 대표인 바티스타가
일으킨 쿠데타는
그저 바티스타의 허영과 납득할 수 없는
권력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바나의 화려한 밤거리와는 달리
쿠바 국민들의 삶은 피폐했다.
전화, 전기, 통신 분야의 92%,
공공 산업의 80%,
공공 철도의 50%를 이루는
사회 인프라가 미국 기업 소유였고
쿠바의 유일한 수출품인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농장의 지분 60%가
전부 미국 기업과 미국 자본이
완전히 독식한 상태였다.
사회, 기업 각 분야의 쿠바 노동자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익은 모두 미국 기업이 차지하는
모순적인 구조를 안고 있었으며
식량의 50%를 미국에 완전 의존해
미국에 주권을 의존해야 할 정도였다.
하바나에 자리한 300군데의 사창가와
15000명의 매춘부는 그만큼 일자리가 없어
몸을 팔아야하는 처지의 국민들이었으니
결코 쿠바의 자랑이 아니었다.
600만 국민중 50만명이 실업자여서
소득이 거의 0이었으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수가
전체 국민의 43%에 이르었다.
바티스타 정부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17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국내 정치는 탄압하고 미국 기업에게
각종 이권을 팔아치웠다.
미국의 정유 기업들이 쿠바에 들어와
원유를 마구 수입하고 정제하였으며
기업을 따라 은행들도 들어서면서
금융권도 미국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바티스타 정부가 아무리 부패해도
친미 성향이었던 바티스타였기에
미국은 이런 바티스타 정부를 비호하며
오히려 편들기에 나섰다.
미국
"요즘같이 빨갱이들이 판치는 시대에"
미국
"적어도 쿠바는 반드시 내 편이어야함"
게다가 미국에서 건너온 마피아들이 쿠바에서
카지노, 매춘, 돈세탁을 자행하면서
쿠바는 완전히 미국의 하수구
처리장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쿠바 국민들은 바티스타 정부도,
미국도 상당히 싫어하였지만
쿠바 국민
"쿠바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질
자본주의 마피아 미국놈들!!"
바티스타 정부는 미국을 너무 좋아하여
국민과 정부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폴헨시오 바티스타
"미국 좋아"
바티스타는 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후에
비밀 경찰을 운용하고
정치 자금을 착복하며 횡령을 저지르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숙청된 사람만 공식 집계된 인원은 1000명,
비공식적으로 최대 20000명으로 추산된다.
"헐"
썩어빠진 군부와 지배계층의 부패에
민중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의 집권을 기다리며
쿠바 내부에 반감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3년 7월 26일,
무장한 반 정부군이 몬카타에 위치한
정부군 병영을 급습하며 전투가 벌어졌다.
반 정부군은 잘 훈련된 정부군의 반격에 밀려
160명 대원중 16명이 교전 중 사망,
80명이 포로로 잡히고 50여명의 처형되는 등
급습은 커녕 괴멸적인 피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전투의 결과와 상관없이
쿠바인들의 마음을 들끓게하였으니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쿠바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전투에 패배한 직후 카스트로도 포로로
잡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카스트로는 왜 사형이 아님?"
"카스트로를 붙잡은 수색대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라서 사형은 면했다고해"
피텔 카스트로
"야비한 독재자의 분노를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피델 카스트로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피델 카스트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바티스타 정부는 이 전투를 시골에서 벌어진
작은 사고로 취급하며 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반 정부군이 교전을 벌였다고?"
풀헨시오 바티스타
"그래서 뭐?"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겼으면 됬음"
하지만 바티스타의 방심과 달리
혁명의 기운은 계속 퍼져나갔다.
카스트로는 감옥에서도 혁명의 당위와
필요성을 논술하는 책을 쓰며
어떻게든 쿠바인들에게 혁명을
촉구하며 계몽에 앞장섰다.
바티스타의 승리의 축배는
곧 방심이었다.
나쁜놈이 더 잘산다
바티스타는 수도 하바나에 대규모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
호텔, 리조트, 경마장, 카지노 등
쿠바를 중남미 최대 관광 국가로,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돈다발을
싹 쓸어먹을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시 쿠바는 인접해있는 카리브해의
여러 국가들 중에 제일 잘살았고
중남미 국가들과 비교해 보아도
꽤 높은 소득을 유지했다.
아열대 기후를 갖춘 야자수와
해변이 펼쳐진 낭만적인 도시에
미국에서 가까운데다가 영어가 통하고
저렴한 물가까지.
미국인들에게 쿠바는 파라다이스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항공사들은 쿠바로 가는
비행기 값을 앞다퉈 낮추며
미국의 1등 부자 시민을 최대한 많이 모아
쿠바로 모시겠다고 안달이 났다.
하바나가 사치와 도박으로 가득찬 향락의 도시로
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온 힘을 투자해
바티스타와 한 배를 탄 마피아는
완전 대박을 쳐서 쿠바에서 보란듯이
승승장구하였다.
마피아
"하하하 좋아"
바티스타는 쿠바의 변화에 크게 동조해
자신의 지도력에 자신감을 가지게되었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하하하 정말 보기 좋군"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치범들 다 석방해!"
1955년 5월, 바티스타는 사회 유화책으로
정치범을 석방해주며 안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때 갇혀있던
카스트로도 석방되었다.
카스트로는 멕시코시티로 떠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중남미 혁명을 이끈
전설적인 아이콘
'체 게바라(Che Guevara)'를 만나며
쿠바 혁명의 일대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한편 카스트로도 떠나고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보이는 쿠바는
1956년 10월 28일, 랜스키가 운영하던
몽마르트 나이트 클럽에 무장 게릴라가 난입해
"타타타타타탕"
보안 경찰 대장 대령을 사살하는 등 혁명의
혼란은 더욱 커지기만 하였고
1957년 3월 13일에는 반 정부군이
수도 하바나를 기습해
대통령궁과 방송국에서 전투가 벌어져
정부군 5명과 반 정부군 45명이 사망하였다.
바티스타 정부는 어찌어찌
반란군을 진압했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난무하는 모습은
관광객들에게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하바나에 있던 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떠날 조짐이 보이자
마피아의 사업에도
비상불이 켜졌다.
마이어 랜스키
"큰일났다"
이제 마피아들이 직접 발벗고 나서서
관광객지키기에 온 힘을 쏟았다.
카지노와 도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이상의 것을 관광객들의 기억에 각인시켜
잊지못할 밤을 선사하였는데
밤마다 선보이는 화려한 라이브
스트립 쇼와 퍼레이드,
끝내주는 나이트 클럽에서 서빙되는
쿠바 럼과 칵테일,
아름다운 아열대 미인들의
환상적인 룸바 댄스에
빙고 게임을 우승하면 상품으로 타가는
고급 자동차까지.
쿠바를 카지노 제국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계획에 너무나 충실히 따랐다.
마피아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쿠바에 메달리는 이유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쿠바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때문이었다.
코모도어 호텔과 카지노,
산 수시 나이트 클럽과 카지노에서
이미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돈 쌓기에 여념이 없었고
하바나에 14층 규모의 디오빌 호텔을
이제 막 완공해놓았으며
6개월 후에는 카프리 카지노 호텔까지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완공될 예정인 리베라 호텔은
이것보다 훨씬 최고급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모든게 쿠바 단 한 곳에 집중된
야심과 향락의 일대기였다.
계속되는 혼란에도 마피아는 쿠바 사업에는
문제가 없다고 사태를 관망하였지만
내심 쿠바의 현실에 큰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존 F. 케네디와 마피아
마피아는 돈다발을 뿌리며
관광객들을 붙잡아 두었지만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마이어 랜스키
"겉으로만 보여주는게
전부가되면 안돼"
마이어 랜스키
"바티스타하나만 믿었다가는
우린 다 망하게 생겼다고"
마피아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손길을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쿠바는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많은 정치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갖거나
미국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곤했는데
예를 들어 카지노나 도박 그리고
섹스 산업이었다.
하바나를 중심으로 약 300군데의
사창가가 거리를 채웠으며
15000명의 매춘부가 이곳에서 일하며
미국인 관광객을 상대했다.
'하바나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말은 이미 너무 유명했다.
매춘은 기본이고 호스트 바와
레즈비언 쇼를 비롯한 각종 섹스 파티에
백인, 흑인, 인디오 미인들이
한데 모인 스트립쇼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찾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마피아들은 정치인과 고위층을
극진히 대접해주며
인맥을 쌓고 정보를 얻으며 암암리에
공생관계를 이어왔다.
그리고 그 중에는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젊고 매력적인 차세대 스타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도
포함되어있었다.
케네디는 1957년에 들자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이는 젊은데 영리하고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데다가
대대로 정치권에 몸을 담근 엘리트,
미국이 바라는 올바른 청년 이미지 자체였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개신교 사회인 미국에서
케네디는 카톨릭 신자라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별로 거론되지 않을 정도로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젠틀한 이미지에
잘생긴 얼굴까지.
그래서인지 정치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여성층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정도였다.
"오빠!!"
케네디는 1957년부터 18개월동안
하바나에 자주 방문했다.
그리고 이때 랜스키는 케네디가 하바나에
들어서면 아주 친절하게 모시며
케네디가 묵는 호텔은 고급 특실로 잡아주고
모든 여행 경비를 일체 부담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아름다운 여자 3명을
케네디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케네디는 독실한 바른 청년이었지만
이러한 이미지 반대면에는
3명의 여자와 함께 난잡한 섹스를 즐기는
또 다른 모습이 존재했다.
그리고 랜스키는 케네디의 옆방에서 투시 거울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볼 뿐 이었다.
마피아와 케네디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케네디는 마피아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다시 혁명
한편 1958년이 되자 카스트로는 다시
쿠바를 혁명으로 밀어넣었다.
쿠바 전역에서 반군이 난립해
농장에 불을 지르며 혼란을 가중했고
하바나에서 열리는 카 레이싱에
참가하는 레이서를 납치하기도하고
하바나 인근의 에소 정유소에 방화해
40만 갤런에 달하는 항공유를 불살랐다.
그리고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와 연합하여
점점 하바나로 진격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58년 2월 인터뷰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피델 카스트로
"우리는 쿠바의 외국자본을 몰수하거나
국유화할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쿠바에 있는
외국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열렬한
공산주의 신봉자였다.
지금까지 모든 공산주의 혁명이
그러했든
외국인은 내쫓기고 외국 자본은 몰수당해
국가 소유로 돌아 갈 것이 뻔했다.
그런데 인터뷰는 저렇게 발언을 하니
외국 투자자들은 더욱 갈팡질팡하였다.
"어떡하지"
"바티스타가 이기지 않을까?"
"그러다 진짜 혁명이 되면
우린 다 깡통차는거임"
"카스트로를 믿어봐...?"
"니 마누라 남자친구가 그게
좋은생각이라고 하디?"
"ㅋㅋㅋㅋ"
"쿠바 손절함 흑우들 잘있어"
그리고 랜스키도 머리가 아플만큼
고민이 커져갔다.
마이어 랜스키
"진짜 어떡하지"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전부
거짓말인것처럼
마피아는 모든 사업이 술술 풀리며
분위기는 최고조를 찍었다.
게다가 1958년 3월, 리베라 호텔보다 더 화려한
하바나 힐튼 호텔이 개장하였다.
지역 신문은 연신 호텔의 사치스러움을
보도하며 호텔은 명물이 되었고
마피아는 축배를 들며 앞으로의 미래를
축복하며 자찬하였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쿠바의 고위층들은
조용히 재산을 처분하며 언제든지
쿠바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