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교양있는 사람을 원한다 (당신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

글사람. 2020. 7. 2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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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양에 관한 외침    

 

죽은 듯 보이지도 않던 인문학이

어느 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산업화를 거치며 경제 발전에

모든 것을 쏟아 붓던 우리 사회가

 

슬슬 결핍을 느끼고 현대인의

갈증을 해소할 무언가를 찾고있는데

 

인문학에서 그 답을 찾고 밀린 숙제를

하듯 열심히 챙기고 있다.

 

'인문(人文)'이라는 말은 풀어 말하면

'인간 문화'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여러가지 언어,

예술, 학문 등 생존과는 관련이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증명해주고 동시에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행위,

 

이러한 것을 포함하는 문화라는

폭넓은 지식과 품위라고 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는 '교양(敎養)'과

그 뜻이 비슷하다.

 

둘의 차이를 억지로 나누자면 인문학이

좀 더 학문적 의미에 가까운 반면,

 

교양은 태도나 의식같은 생활적 의미에

가깝다는 깊이의 차이가 있어서

 

교양이 인문학을 포함하는 더 큰 뜻으로

분류된다. (물론 차이가 그리 크진않다.)

 

즉, 인문학을 알려면 그 뿌리인 교양을

알고 있어야하고

 

교양을 안다면 인문학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알아야한다.

 

교양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7~18세기에

 

근대 시민 사회가 태동할 때쯤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이다.

 

신분 특권을 누리는 귀족을 깨고

새로운 주체로 부상한 부르주아들은

 

가만보니 단순히 돈만 많다고 사회의

주체노릇을 할 수 없음을 알아챘다.

 

부르주아

"귀족넘들 그냥 돈 좀 있고 밥맛인

애들인 줄 알았더니"

 

부르주아

"온갖 고상한 척, 유식한 척이

유난떠는게 아니었네?"

 

귀족들처럼 사람 노릇을 하려면 적어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배움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된 부르주아들은

학문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당시 교육수준으로는 교육자체가

여유있는 귀족의 권리인데다가

 

엄연히 신분이 있는 귀족들이 평민인

부르주아를 가르쳐줄리 만무하고

 

평민에게는 배움이 어림도 없는 소리라서

결국 스스로 개척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있던 과거 성인들의 말,

고서의 가르침을 찾아 연구하면서

 

근대의 교양은 고전의 지혜와 근대의

경험이 합쳐진 학문이 된 것이다.

 

비로소 인간의 힘보다 지식을 신봉하는

계몽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먼 옛날, 고대 그리스시절만 해도

군주의 덕목은 지식보다 힘이었다.

그리스 조각상은 인간 육체미를 강조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 전쟁 편에서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훌륭한 장군 아킬레우스가 등장하는데

 

아가멤논은 음흉하고 간사한하게

묘사되는 반면

 

아킬레우스는 힘있고 무예도 뛰어난

시대의 명장으로 묘사된다.

 

이 둘은 같은 편이지만 여자 문제로

다투고 서로 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킬레우스

"얼굴도 못생긴 쫄보에

술만 쳐먹네 저 XX"

(개의 얼굴에 암사슴의 심장을 가진

주정뱅이여!)

 

아킬레우스

"넌 전쟁터에서 싸우지도 않는 주제에

민폐만 끼치잖아 이 XX야...(중략)"

(그대는 전투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무리의 피를 빨아먹고...중략)

 

아킬레우스

"아오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잔머리만 굴리네 진짜 넌...(중략)"

(오 그대 파렴치한 자여, 교활한 자여...중략)

 

하지만 그럴때마다 아가멤논은

찌질하게 별 말도 못한다.

(참고로 아가멤논이 더 높은 상관이다.)

 

여기서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시대가 

지향하는 군주의 조건을 알 수 있다.

 

아킬레우스처럼 힘있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자가

 

아가멤논처럼 머리만 굴리는 간사한

사람보다 더 훌륭한 군주라는 것이다.

 

영화 300을 봐도 3대 800은 칠 것 같은

근육질 남자들이 영웅으로 묘사된다.

 

영웅과 군주는 공부따위 하지 않는법.

힘과 육체미가 최고였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이런 인식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참주 시대를 거쳐 민주정 시대로 들어선

폴리스 (그리스 도시 국가) 시민들은

 

의회에서 토론을 잘하기 위해

말솜씨가 좋아야했는데

 

이것이 그 당시 현자라 불리던

소피스트들이 말하는'변론술'이었다.

 

소피스트

더보기

소피스트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페르시아가 탈탈 털렸던 살라미스 해전

 

뛰어난 현인이 만인을 설득하여 지혜로운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닌게 실제로

테미스토클레스나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등의 위인이 민회에서

직접 전쟁의 당위를 연설하고

페리클레스

 

전쟁에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 결국

승리로 이끈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 앞에 붙는 수식어가

'그리스 제 1시민'이었다.

 

"노예, 여성이 차별받던 시대에 그냥

시민도 대단한데 제 1시민 칭호까지"

 

때문에 전후 그리스 사회에서는

민회에 나가서 연설하는 것,

 

이것이 최고로 가치있는 목표가되어

정치적, 사회적 성공 지표가 되었고

 

민회에서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것과

상대와 논쟁을 펼쳐

 

논리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수사학과 변론술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가르쳐주는 현인들을

사람들은 '소피스트'라고 부르며 따랐다.

 

소피스트의 위세가 실로 대단했던 것이

당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소피스트에게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수사학을 배우려했고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경우

수업료만 2텔런트에 달했다.

 

"당시 군함 한 척이 1텔런트였는데

수업료가 2텔렌트!""

 

소피스트는 사람들에게 민회에서

말을 잘하는 방법이나

 

논쟁에서 논리로 되받아치는 방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그러다보니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르치는 등

 

오히려 아테네 민회가 무논리 막장으로

변할정도로 개판이 되어갔다.

 

예를 들어 이런 논리도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빚을 져가며 공부를 시켰는데

 

아들은 빚에는 관심도 없고 빈둥대며

매일매일 놀고 먹기만하자

 

보다못한 아버지가 아들을 때리며

크게 나무랐다.

 

아들

"아 왜때려요!"

 

아버지

"너 정신차리라고 그러는거다!"

 

아버지

"널 사랑하니까!"

 

아들

"저도 아버지를 사랑해요!"

 

라며 아들이 아버지를 똑같이

때렸다는 이야기...

 

그런데 소피스트에게는 말의 논리가

합당하므로 아무 문제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소피스트 논리가 개판이 되자

소피스트의 말은 궤변으로 치부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소피스트의 의미는

궤변가라는 의미로 통하게되었다.

 

여담으로 소피스트들은 본인들이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왜?"

 

"철학자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자나"

 

"오 너희는 아직 그정도

경지까지 못올랐다는거?"

 

"아니 이미 지혜로워서 철학자라고

불릴 이유가 없음"

 

"?"

 

그 후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던

소피스트들은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여긴

소크라테스에게 논리로 패배한다.

 

 


 

그러나 말만 잘하는건 궤변에 불과하다며

소피스트를 신랄하게 까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말 장난만 하지말고 진짜

진리, 지식을 알아야함을 강조했다.

 

그때는 공부가 출세하기 위한 수단,

딱 그정도로 여겨지던 시대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출세를 위한 공부일지라도

거기에 윤리적, 인격적 가치를 부여하며

 

전통적인 파이데이아(교육)에서도

일을 잘하는 기능적 탁월함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을 찾고자

한 것이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자'였다.

 

공자는 실용적인 기술인 '육예(六藝)'에

교육을 통해 '인(仁)'을 접목하여

 

일 잘하면서 인성도 좋은 '군자(君子)'를

만들고자 하였다.

 

즉, 교육을 통한 단순한 출세를 넘어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다.

 

로마 시대로 넘어오면서 어떤 인간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졌다.

 

로마의 덕망있는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조각상

 

웅변가의 자질을 논하면서 '후나미타스'를

언급하였다.

 

여기서 후나미타스는 타고난 기질뿐 아니라

배우면서 깨닫는 여러 미덕을 포함하는데

 

이런 미덕은 꼭 웅변이 아니라도 일상 속의

말하기에서 드러나는 지혜,

 

공적인 생활에서 보여지는 유연함,

훌륭한 군주로서의 자질 등을 말하며

 

좋은 글을 읽고 교육하면 모두

깨우칠 수 있다고 하였다.

 

좋은 글 (문)을 읽어 훌륭한 사람 (인)

될 수 있다는 인문.

 

키케로가 언급한 후나미타스는 훗날

'인문(humanities)'의 어원이 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글을 읽으라고 한 이유는

 

좋은 글에 세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혜가 담겨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글에는 영웅과 군주의 서사시, 철학적인

질문이나 미덕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대체로 역사, 철학, 고전에 이런 글들이

써있는데 여기에서 지혜를 배워

 

마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교양을 기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문과 교양을 배우려는

목표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교양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한동안 교양이라는

단어가 왜곡되어 다루어졌다.

 

마치 배운 사람들만 가지고있는

엘리트 정신처럼

 

보편적인 교양이 아닌 권위주의적

교양으로 해석되어

 

못배운 사람을 나누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

 

"천박하게 교양없긴..."

 

하지만 교양은 영어 'culture', '경작하다'

독일어 'Bildung', '형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정신을 개발하여 완전한

인격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즉, 배움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에게

인격이 형성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듯

형성되는 교양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만, 오늘 날 사회는 상향 평준화되어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대치도 높기때문에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질 좋은 교양과 인격,

그에 맞는 행위를 바라는 것이다.

 

"80년 대에는 용인되던 행위가

지금은 안되는 이유는"

 

"그만큼 시민 의식이 성숙해졌기

때문이지"

 

버스내 흡연이 가능했던 80년대, 코를 막고있는 뒤 여성분 주목

 

그래서인지 더 질 좋은 교양을 배우려고

마치 교양을 스펙처럼 여기기도한다.

 

때문에 교양을 떠올리면 지나치게

고급하고 편향적이며

 

여전히 엘리트적이고 고전적일 것이라는

편견도 같이 생긴다.

 

하지만 교양은 결코 고급하거나

귀족적인 벽이 아니다.

 

음식을 품위있게 먹는 방법이라던지

사교 모임 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중국 부자들 사이 유행하는 바나나 예쁘게 먹는법

 

그저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정상적 인간이 지닌 건전한 지성)

 

거리에 침을 뱉지 않는다, 공공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다 등

 

개인이 사회와 어울리기 위해 배우는

예절도 교양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마저 지키지 못하면

교양없다고 질타를 받기도 하지만"

 

"엘리트 의식에서 낙인하는 질타가 아닌

대중 상식에 기반한 질타라고 할 수 있지"

 

"거리에 침을 뱉지 않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니까"

 

과거에 비해 시민 의식, 교양이 점점

성숙했듯이

 

현재보다 미래에는 더 성숙한

교양이 통하는 사회가 다가올 것이다.

 

즉, 현재의 교양을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교양있고 더 상식적인 수준을 위해

무언가 더 배워야하는 시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양있게 살고자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교양을 배우고자 책을 읽는

이유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한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어울릴지

고민하는 것은

 

그 인간이 얼마나 바람직한가 또는

그 사회는 얼마나 바람직한지를 전제로 한다.

 

즉, 사회에서 시민들이 어떤 소양을 안고

살아야하는지를 같이 고민하게되는데

 

여기서 이상적인 인간상과 사회모델을

제시함으로서 사회가 성숙할수록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소양'의 필요성을

더욱 잘 느끼게된다.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공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을 장려하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성숙한 시민 의식과

상식적인 행동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공교육만이 모든 답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이 상식적이고 어떤 것이 상식인지의

범위는 사회로부터 알아 낼 수 있지만

 

왜 상식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은 그러한 고민을 통해

사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정의하며

자신의 정체성에도 한 발 가까워지는데

 

책은 이러한 행위를 도와준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자극적이며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내용이나

 

기본 상식과는 부합하지 않은 내용이

담겨있는 것을 논외로 한다.

 

보통의 책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쓰여지는데

 

그러다보니 대중에게 통하는 생각과

관념, 사상을 담고있으며

 

누구나 생각해볼만한 보편적인

견해가 있다.

 

즉, '인간이라면 통하는 생각'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보통의 상식적인 지성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인간이라면 통하는 생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책의 내용이나 관념이 달라지겠지만

잘못된 정의로 책이 쓰인다면

 

책 자체가 사회에서 배척받고

내용마저 낱낱이 반박되기 십상이다.

인종차별과 전체주의적 내용인 히틀러의 나의 투쟁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란?

더보기

나의 투쟁

 

히틀러는 나치당 존속과 

지지자들의 결탁을 위해

 

자신의 철학과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담은 책을 집필하였는데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원래 제목은 '거짓과 어리석음, 비겁함에 맞선

4년 반 동안의 투쟁'이었으나

 

출판사 대표

"이렇게 제목이 길면 아무도 

안읽을것 같은데요"

 

라는 말에 간략하게 '나의 투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집권하자

판매량이 미친듯이 치솟았으며

 

당시 독일의 신혼 부부들은 거의

필수로 책을 선물받았다고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이러하다.

 

·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을

  무너뜨리려 음모를 꾸민다.

 

· 독일을 정복하기위해 만들어진

  유대-볼셰비즘과 싸워야한다.

 

· 역사의 진보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

  아닌 인종의 투쟁이다.

 

· 인류의 모든 창의적이고 훌륭한 예술과

 기술은 모두 아리아인(독일인)이 이루었다.

 

· 따라서 아리아인은 세계모든 민족위에 

 군림해 지배해야한다.

 

· 이를 위해서는 독일은 신속히 재무장하여

  영국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 프랑스, 동류럽과 전쟁을 벌이고

 최후엔 소련을 무너뜨려

 

· 독일 게르만 민족이 살아갈 권역을

 영구히 확보해야한다.

 

· 수백년동안 장애인을 솎아낸다면

 건강한 인류만 남을 것이다.

나치의 인종 개량사업

 

· 20세 이상 청년들은 군대에 입대해

 민족 자긍심을 께우쳐야한다.

 

· 민주주의는 책임의 소재를 흐리게하는

 유대인의 음모다.

 

나의 투쟁은 히틀러의 사상과 

나치즘을 온전히 담고있어

 

독일 정부는 2015년까지 이 책의

출판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치나 학술적

면모에서 연구할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부터 나의 투쟁 원본에 반박 글과

비판 주석을 함께 재출판을 허용하였다.

좌 원본 우 현대본-비판글이 추가되어 두꺼워짐

 

"대신 비판 주석이 없이 출판하면 

선전죄로 처벌받아"

 

러시아는 아예 2010년부터 모든

출판을 금지하였고

 

그리스, 네덜란드, 벨기에, 세르비아, 폴란드 등

독일 침략을 당했던 국가들은 모두 금서이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이 책으로 막대한

인세를 얻었지만 세금은 한 푼도 안냈다.

 


 

때문에 책은 완전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지식 전달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SNS나

인터넷상의 글보다

 

더 무게있고 더 큰 책임을 져야하는

책의 특성이기도하다.

 

굳이 책이라 함은 책과 접근성이 비슷한 

대체 수단을 비교해보았을 때

 

오류의 정도가 책이 압도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대체할 수단이 많아져도

여전히 책의 수요는 줄지 않으며

 

미래에도 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책이 수 천년간 인간의 교양, 지식을

책임졌다는 보증된 믿음이랄까?"

 

 

   교양있어야 하는 이유   

 

교양을 통해 인문을 넓히고

힐링한다는 아름다운 이유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알아야

진정으로 교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된다.

 

흔히 말하는 '꼰대'는 타인의 상황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만을 내세우며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나때는 그랬어~"

 

"근데 넌 왜 그래!"

 

특히 한국 사회와 같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시간안에 발전하여

 

한 세대가 2번, 3번의 사회 변동을

겪은 사회는 꼰대가 될 여지가 많은데

 

이것은 윗 세대뿐만 아니라 지금 세대도

꼰대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꼰대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잊고

 

타인에게 반응하는 감각이

예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세대 간의 이해는 물론

사회 통합에도 악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이해 결여로 스스로

사회에 도태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면

 

자신도 결국 똑같은 처지임을

알게된다.

 

여기서부터 나와 타인이 공유하는

상식 즉, 교양이 통하게된다.

 

이것이 반복되어 타인으로 가득한

사회를 이해하는것,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교양을

배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올바른 사고를 위해 무지를

최소화할 수 있다.

 

논리의 창은 무지의 갑옷을

뚫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어떻게 논리를 말할 수 있겠는가.

 

논리를 통해 합리를 이끌어 내려면

먼저 논제를 세워야 한다.

 

논제를 세우기 위해서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인지하고

 

그에 맞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등의

논리적 사고가 따라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가 실현될때

비로소 올바른 사고가 시작된다.

 

교양이 추구하는 목표도 올바른 사고를

가진 올바른 인간을 양성하는 데에 있다.

 

교양을 배우고자하면 항상 지식이

뒤따라 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라

 

결국은 무지하고 싶어도 무지할 수가

없고 무지한 교양은 비약해진다.

 

사회는 빠르게 변동하고 있고 누구나

재사회화를 거쳐야하는 때가 온다.

 

재사회화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새 지식을

배우며 일생이 배움 자체가 된 현대는

 

늘 교양있게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에 걸맞는 행동을 위해서라도

점점 더 교양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교양을 통해 도덕을 실현시킬 수 있다.

 

교양은 마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세상을 이루는 다른 인격체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잘 이루어지며

 

소위 말하는 '착함'이 드러날때

관계는 더 쉽게 맺어지는데

 

착함은 마음이 어질고 바르다라는

뜻처럼 누구에게나 통하는 마음을 말하며

 

이는 누구나 공유하고 공감하는

도덕적 가치에도 잘 부합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체는

사회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건강한 관계를 통해 다른 인격체를

이해하며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하지만 도덕적이기만 해서는

반드시 교양있다고 할 수는 없다.

 

도덕적으로 완성되어도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지 모른다면

 

도덕성은 자연스레 멈추고

오히려 퇴색될 수 있다.

 

결국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지

알아야 도덕이 실현되며

 

'왜'를 찾는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 도덕의 필요성을 찾게되는데

 

교양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함과 일맥상통한다.

 

"도덕적으로 질타받을 행동을

목격하면"

 

"상식이 없다, 교양 없다고 욕을

하는 이유도"

 

"암묵적으로 도덕성과 상식, 교양을

같은 맥락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지"

 

교양이 들어올 틈도 없이 바쁘게

치여사는 현대인에게는

 

교양이 마치 꼭 필요하지 않은

장식으로 느껴지지만

 

그럴수록 인간에게 교양이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사회가 교양없다면 과연

개인도 교양없어야 할까?

 

교양없는 사회이기에

교양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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